[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무명 방송작가에게 최저임금은 사치다”

나는 방송계 전체가 마약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몸이 망가지고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때로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방송계만의 오묘한 흥분에 이성적인 판단은 마비되고 일을 계속한다.”

방송프로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 번쯤은 방송작가 되기를 꿈꾼다. 아이돌 연예인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연예인이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예인 지망생들은 혹독한 훈련생의 시기가 존재하고 소수만 데뷔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방송작가들은 이보다 더 나아가 기본적인 대우조차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현실과 마주친다. 그곳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자 방송작가였던 한 분을 홍대의 카페에서 만났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해달라.
“최근 언론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열정페이를 받고 5년간 방송작가 일을 했었다. 극악의 외주제작사와 비교적 대우가 좋은 공중파 본사 등에서 청춘을 헌납하다 고민 끝에 이직을 결정하였다. 최근에는 공기관의 계약직 근로자로 일하고 있다. 계약 기간은 1년도 되지 않는 단기근무라 주변은 걱정이 많지만 이상하리만큼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일못유니언에 현재 일하는 곳에 입사하기 전 도움을 요청했다.
“일못에는 상사나 동기, 심지어 자신을 스스로 일 못 한다고 칭하는 ‘우리 세대’로 가득하다. 이곳에서의 위로는 마치 일본드라마 ‘전차남’에서 주인공이 위로받던 그런 느낌과 비슷한 곳 같다. 물론 이곳에서의 소통이 ‘나를 일을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지는 않지만 서로 간의 위로와 격려만으로도 큰 힘이 되어준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고민을 털어놓게 된 것 같다.”

방송작가였단 경력에 공공기관의 홍보 담당자로 변신하였다. 뭔가 평범하지 않은 커리어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가.
“방송작가를 그만두게 된 계기는 건강이었다. 4~5년차가 되니 갑자기 막막해졌다. 정신 차려 보니 어느덧 나이는 20대 후반. 꿈보다는 현실과 돈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나이가 되어 갔지만 통장 잔액은 여전했고 몸은 점점 병을 달고 살게 되었다. 공황장애와 그 밖의 몇몇 몹쓸 병들을 안게 되었다. 나는 방송계 전체가 마약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몸이 망가지고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때로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방송계만의 오묘한 흥분에 이성적인 판단은 마비되고 일을 계속한다. 워커홀릭이었던 나도 결국은 몸이 이상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고 ‘일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병원을 나서면서 생각했다. 방송계 일이 아닌 다른 분야의 일은 시시하겠지라는 생각은 오만이라는 것. 세상에는 수만 가지 일들이 있다. 역시 방송계가 아닌 세상 밖으로 나와 보니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

방송작가 시절 힘들었던 이야기를 해달라.
“최근 스트레스 많은 직업 순위가 SNS에서 유행이었다. 이 순위에서 방송작가는 3위였다. 개인의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내가 모르는 작가의 계좌로 제작비를 빼돌린 피디(그는 성희롱도 했었다), 2개월 이상 월급을 미뤘던 제작사, 수개월 전부터 예고한 뒤 퇴사했지만 쌍욕과 갖은 협박 메시지를 밤새 보냈던 메인작가 등이 있었다. 내가 방송작가를 그만두는 시기에 한 제작사에서 막내작가가 디졸브(프로그램을 옮기며 인수인계하는 기간)를 하다가 과로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올해가 되어서야 방송작가 표준계약서 제정에 나선다고 한다. 이런 이들에게 최저임금은 사치다. 나는 그 당연한 사치를 방송계를 떠난 이제서야 누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작가가 좋았던 점은.
“수없이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범죄자와 정신질환자, 기초생활 수급자, 성소수자, 국무총리와 대통령 비서실장, 영화감독과 대기업 회장님, 신기한 만남들이었다. 방송은 내게 정말 감사하면서도 미운 곳이다. 힘듦의 연속이었지만 즐거움의 연속이기도 했다. 나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겠지만 많은 작가들이 과거와는 다른 좀 더 나은 조건에서 일을 하길 바란다.”

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

혹시 방송작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해줄 수 있는 현실적인 조언은.
“도망치라고 말하고 싶다. 이 말을 들었음에도 하고 싶다면 말리진 않는다. 지금 이 글을 다 읽고도 하고 싶다는 건 진짜 말릴 수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체력이 강한지를 생각해보시길 바란다.”

<김종수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