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1월의 겨울밤. 맨발의 사내가 낮은 지붕 사이를 뛰어 달아난다. 무장경찰 수백 명이 세 시간을 쫓았으나 검거에 실패하고 만다. 며칠 뒤 경찰은 그의 은신처를 덮쳤고,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총알 한 발을 스스로에게 쏴 자결한다. 11발이나 되는 총구멍을 몸에 새긴 채 남긴 유언은 “대한독립 만세.” 의열단원 김상옥의 최후다.
100년 전 3월 1일에 일어난 만세운동의 불길은 무장투쟁 결의로 이어졌다. 그 선두에 약산 김원봉을 의백(義伯)으로 한 ‘의열단’이 섰다. 의열단은 조선총독부, 부산경찰서, 밀양경찰서, 동양척식주식회사 같은 일제의 폭압기구에 폭탄을 던지고 요인을 암살했다. 이름처럼 뜨거웠다.
2018년 3월 김원봉의 밀양 생가터에 의열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의열단원 13명 중 5명(김상윤·김원봉·윤세주·한봉근·한봉인)이 밀양사람이다. “의열단의 이름으로 적의 밀정을 척살한다”는 영화 <밀정>의 대사는 이들의 마지막 강령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에서 나왔다. 1은 9를 위하고, 9는 1을 위해 헌신함을 강령으로 삼았고, 무엇보다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을 다짐했다. 죽지 않고 살아남아 단의 뜻을 이루자는 약속. 물론 지키지 못할 공약이었다. 약관의 청년들은 고인이 되어서야 한자리에 모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의열단장 김원봉에게 아직 냉담하다. 조선의용대장,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임시정부 마지막 국무위원(군무부장)까지 지낸 걸출한 독립운동가는 좌익 계열의 월북자로만 남아있다. 국가가 공인한 친일파와 순국선열이 나란히 국립현충원에 묻혀 있는 현실이 보여주듯, 울퉁불퉁한 우리 현대사가 만든 질곡이다.
영화 <암살>에서 저격수 안옥윤은 말한다. “저 둘을 죽인다고 독립이 되냐고? 모르지…. 그렇지만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여성독립투사 남자현 선생을 모델로 한 안옥윤의 대사는 관객이면서 후손인 우리의 마음을 울렸다. 의열단원 김상옥 열사의 드라마틱한 최후는 2016년 영화 <밀정>의 첫 장면으로 재현됐다. 일제하 현상금 넘버원(현재 시세로 환산하면 300억원)이었던 저항군,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경찰에게 치욕을 당한 비운의 애국자, 불가피하게 월북을 선택했으나 결국 불행하게 삶을 마감한 김원봉 또한 창작자들은 놓치지 않았다. 남과 북, 두 조국에서 모두 잊힌 무관의 제왕 김원봉을 복원한 건 영화 <암살>의 강렬한 대사 한마디였다.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
분단과 반공, 독재의 암흑기를 거치며 반쪽짜리 상상력만을 허락했던 문화불모지 한국에서 창작자들이 이뤄낸 성과다. 시대착오적인 가이드라인이 논란이 된 요즘 새삼 확인하게 되는 문화예술의 ‘선한 영향력’이다.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올해, 정부는 대한민국 100년을 기리는 단어로 ‘기억’과 ‘감사’를 골랐다. 뜨겁게 살았으나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이들을 기억하고, 비극의 역사 때문에 제대로 부를 수 없었던 이름에게 감사하는 일이야말로 3·1운동의 정신을 온전히 계승하는 일이다.
<이선옥 작가·이선옥닷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