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선의 눈]메르스와 싸우는 성실한 영웅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첫날 얘기는 페스트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람들은 환자를 피하고 환자에게서 달아났으며, 그리하면 자기만은 살 수 있다는 잔인한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병에 걸리면 버림받고, 돌보는 사람이 없어지는 형편이었습니다.” 필립 지글러의 <흑사병>도 그 무렵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귀족이나 성직자, 부유한 상인들은 시에서 피신했고, 남은 자들은 취향에 따라 술에 취하거나 간음하거나 지하실에 숨어들었다. 기다릴 미래가 없고 자신이 관여하는 모든 것이 사라질 위협에 처한 상황에서 중세인이 어떻게 책임감 있게 행동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페스트를 겪으며 자신이 사는 세계, 자신의 운명을 조금도 알 수 없음을 자각한 중세인들은 비관주의에 빠져들거나 삶을 포기하는 방탕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중세 유럽 인구의 3분의 1 이상을 희생시킨 페스트는 이렇게 공동체를 해체시키고 인간들을 파괴시켜 버렸다. 역사를 돌아보면 전염병의 공포는 인간 사이의 유대를 끊어 놓곤 했다. 독일에서 유대인들이 우물에 페스트 독을 풀었다며 그들을 대학살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성직자들조차도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놔두고 먼저 도시를 탈출했다. 전염병의 위협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돌아볼 겨를을 허락하지 않았고, 심지어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킬 것을 요구했다. 따지고 보면 오늘 메르스 사태 앞에서 취하고 있는 ‘격리’ 또한 인간들을 단절시키고 고립시킴으로써 확산을 차단하는 방식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전염병을 이겨내는 일은 인간들 사이의 연대 없이는 불가능하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나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 바로 전염병에 맞서는 인간들의 아름다운 연대이다. 1900년 초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페스트 보고서인 마릴린 체이스의 <격리>를 보더라도, 페스트를 퇴치시킨 것은 무역과 관광을 보호하려고 페스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던 주 정부조직이 아니라 공중위생국장 블루 박사 개인의 힘겨운 싸움이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던 무능한 정부권력과는 달리, 의료인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페스트와 싸운다. <페스트>의 주인공인 의사 리유는 기자 랑베르에게 말한다.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그 성실성이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무능한 정부권력과 헌신적 의료인들의 대비는 오늘 우리의 메르스 사태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뒤늦게 나타난 대통령은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주문하는가 하면, 활짝 웃는 표정으로 동대문시장을 누비며 브로치와 원피스를 샀다.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고 여전히 불안해 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 모습 어디에서도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데 대한 일말의 책임 같은 것은 전해지지 않았다. 우리의 참담해진 마음을 대신 위로해준 것은 중환자실에서 메르스와 싸우고 있는 어느 간호사가 보내온 글이다. “어느 모임에선가 내 직업을 자랑스럽게 말하던 내 모습이 스쳐갑니다. 가겠습니다. 지금껏 그래왔듯 서 있는 제자리를 지키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메르스가 내 환자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맨머리를 들이밀고 싸우겠습니다.”

유창선의 눈

대통령과 정부는 저토록 못났지만, 목숨을 걸고 메르스와 싸우고 있는 우리 의료인들은 위대하다. 인간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이 있다면 바로 이런 때다. 이 땅의 모든 ‘리유’들에게 감사드린다.

<시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