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더 거둬 재분배정책을 쓰기 전에 시장에서 분배가 악화되는 것부터 막는 것이 복지국가 건설의 첫걸음이다.
“민주·새누리 복지공약, 알고 보니 민노당 것 베꼈네.”(1월 13일, 조선일보) 조선일보가 한탄하면서 은근슬쩍 색깔을 칠할 정도로 각 당의 복지 경쟁이 뜨겁다. 새누리로 갈아탄 한나라야 그렇다 쳐도 과거 민주당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절에 복지정책에 나름대로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어떤 지표로 봐도 양극화는 심해졌고, 국민의 불만은 더욱 더 깊어졌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후 한탄한대로 빨간 줄 좍좍 쳐서 복지예산을 더 늘렸다면 괜찮았을까? 혹시 정권이 바뀐다 해도 또 한 번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 이명박 정부 같은 토목형 시장국가가 다시 들어서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 그림은 소득불평등지표 중 가장 간단한 지니계수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수치는 낮을수록 소득이 평등하다는 걸 의미하는데, 예컨대 지니계수가 0이라면 전 국민의 소득이 똑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림은 1990년대 중반까지 소득불평등이 소폭 개선되거나 갈짓자 걸음을 보이다가 1997~98년 외환위기 이후 악화일로를 달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처분소득을 기준으로 하는 붉은 선은 재분배정책이 반영된 결과를 나타낸다. 붉은 선의 추이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때의 복지정책의 결과로 불평등도가 다소 수그러든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푸른 선의 기울기가 계속 가팔라진다면 아무리 복지예산을 늘려도 평등을 달성하기 힘들어진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복지사회 제1의 적은 시장에서의 분배 악화다. 무엇보다도 전체 GDP에서 이윤 몫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그 중에서도 대기업 이윤 몫의 비중이 더 커진다면, 그리고 임금 몫에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 간의 격차, 남성과 여성 간의 격차가 커진 것이 푸른 선의 기울기가 가팔라지는 이유다. 또 하나 부동산이나 금융자산의 소유가 한편으로 쏠려서 이자소득이나 부동산 소득이 양극화된 것도 지니계수가 커지는 이유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는 기초생활보장법을 도입하고, 건강보험 보장성을 높였으며, 사회서비스 일자리를 늘리는 등 나름대로 최선을 기울였지만 정작 시장에서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통해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대기업의 하청단가 인하를 막지 못했으며, 자산 거품을 부추겼기에 결국 국민의 고통을 줄이지 못했던 것이다.
지난번에 북유럽 복지국가의 위기가 거시정책 때문이었다는 것을 확인했는데 한국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세금 더 거둬 재분배정책을 쓰기 전에 시장에서 분배가 악화되는 것부터 막는 것이 복지국가 건설의 첫걸음이다. 즉 노동시장 유연화, 공기업 민영화, 규제완화라는 시장 만능의 정책기조, 그리고 수출대기업을 위한 거시정책 운용, 마지막으로 주식이나 부동산 시장을 통한 경기부양정책을 쓰면서 복지사회를 만들겠다는 건 나무에서 물고기를 잡겠다는 것과 마찬가지 소리다. 우리는 앞으로 이런 정책 없이도 경제를 운용할 수 있다는 것, 아니 그렇게 변화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경제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최근 박근혜 비대위원장과 한명숙 대표 간의 한·미 FTA 논쟁도 이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한·미 FTA가 과연 복지사회와 양립할 수 있을까?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남이 말 바꿨다고 비판하기 전에 이 문제부터 숙고해봐야 할 것이다. 하는 김에 자신의 과거 정책기조인 ‘줄·푸·세’가 ‘선택적 복지’와 양립할 수 있는지도 따져보기 바란다. 세상이 바뀌면 옛날 생각도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진정한 정치가가 될 수 있다.
정태인<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