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김연아’ 그 무게를 누가 견딜까

임은수·김예림·유영 선수(왼쪽부터). 올댓스포츠·연합뉴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 <헨리 4세>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 정도로 유명한 문장이 됐다. 정상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왕관을 쓰는 과정도 어렵고, 왕관을 차지하더라도 그 무게를 감당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피겨계에는 이미 이 무게를 이겨낸 주인공이 있다. 바로 ‘피겨 퀸’ 김연아다. 김연아는 한국을 넘어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김연아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피겨는 비인기 종목이었다. 그러나 김연아의 활약으로 피겨는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 7살에 스케이트화를 처음으로 신은 김연아는 말 그대로 ‘천재’의 성장과정을 보여줬다.

은반을 떠난 ‘포스트 김연아’들
주니어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내며 시니어 데뷔 때부터 점차 세계 정상의 자리로 다가섰다. 이른바 ‘그랜드 슬램’이라고 불리는 4개 대회를 정복했다. 세계신기록을 11차례 갈아치우기도 했다. 덕분에 김연아를 바라보며 꿈을 키운 소녀들이 많아졌다. ‘피겨 퀸’을 꿈꾸며 너도나도 은반 위에 올랐다. 피겨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서 지원도 많아졌다. 덕분에 ‘김연아 키즈’로 불리는 피겨 꿈나무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한국은 이후에 김연아가 이룬 만큼의 성적을 달성한 선수가 나오지 않고 있다. ‘포스트 김연아’로 불렸던 선수들은 ‘왕관’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했다. 반면 김연아 은퇴 후 세계무대를 피겨 강국인 러시아 선수들이 누비고 있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최근 들어서 다시 한국 피겨계를 설레게 하는 좋은 유망주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세대를 잇고 있다는 점에서 더 희망적이다.

‘포스트 김연아’의 계보는 김해진(22)과 박소연(22)부터 시작된다. 김해진은 한국 피겨를 짊어지고 갈 재목으로 꼽힌 선수 중 하나였다. 초등학교 시절인 2009년 트리플(3회전) 점프 5종을 모두 완성시켰고, 다음해 초등학생 신분으로 국내에서 열린 선수권대회 여자 싱글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2014년에는 김연아와 함께 소치 동계올림픽 무대를 밟기도 했다. 당시 성적은 종합 16위였다. 그러나 성장기에 찾아온 체형 변화와 부상 등을 이겨내지 못했고, 결국 2018년 1월 은퇴를 선언했다. 해설위원으로서 제2의 피겨 인생을 시작했다.

김해진과 경쟁했던 박소연도 지난 6월 결국 은반을 떠났다. 박소연은 2009년 최연소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등 각종 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 역시 2014년 김연아의 마지막 올림픽을 함께한 유망주 중 하나였다. 그 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9위에 오르면서 기대를 키웠다. 김연아 이후 처음으로 톱10을 달성한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2016년 12월 훈련 도중 복숭아뼈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어 수술대에 올랐다. 재활기간을 거치고 다시 컨디션을 끌어올리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한동안 목발을 짚고 다녔고 체중이 늘어나는 등 체격의 변화를 겪었다.

컨디션을 끌어올린 박소연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선발전에 출전했으나 탈락하는 아픔을 겪었다. 올림픽 이후에 김연아와 함께 아이스쇼에 나선 박소연은 결국 6월 중순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은퇴 의사를 밝혔다.

다음 세대는 최다빈, 김나현, 김하늘 등에게 바통이 넘어갔다. 이들 중 두각을 드러낸 선수는 최다빈(19)뿐이다.

최다빈은 2017년 삿포로에서 사상 첫 동계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 해 세계선수권에서 톱10에 진입하며 평창올림픽 출전권을 스스로 따냈다. 그러나 세계정상급 선수들과는 격차가 있었다. 개인 최고점을 달성했지만 올림픽에서 7위에 그쳤다. 이후 잠시 휴식을 가진 최다빈은 지난 2월 열린 동계체전을 시작으로 다시 시즌을 치르고 있다. 그러나 메달권에는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이해인 선수. 올댓스포츠

‘트로이카’와 이해인
앞서 가능성을 보인 선수들은 크게 기량을 꽃피우지 못했지만 최근 들어 실력이 출중한 선수들이 등장하고 있다.

최다빈 이후에 시니어 무대에 진입한 임은수(신현고), 김예림(수리고), 유영(과천중) 등 가능성을 보인 ‘트로이카’가 등장했다. 임은수는 지난해 8월 시니어 데뷔전이었던 챌린저 시리즈 아시안 트로피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그 해 국제빙상경기연맹(ISU) 그랑프리 4차 대회에서 동메달을 따기도 했다.

지난 3월 일본 사이타마에서 열린 2018~2019시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총점 205.57점으로 10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김연아에 이어 ISU 국제대회에서 총점 200점을 돌파한 선수가 됐다. 첫 시니어 시즌부터 세계무대에서 어깨를 견줄 만한 레벨까지 오른 것이다.

김예림은 주니어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김연아 이후 13년 만에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 출전하기도 했다.

유영은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트리플 악셀을 시도하는 등 무서운 속도로 기량이 성장하고 있다. 올해 1월에 열린 종합선수권대회에서 2연패를 달성했다. 당찬 성격의 유영은 “(어린 선수들이) 내 프로그램을 보고 감동받아서, 연아 언니를 바라보고 피겨를 시작한 나처럼 피겨를 시작하게 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들의 다음 세대로 분류되는 선수들 사이에서도 유망주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이해인(한강중)이 선두다. 이해인은 지난 9월 29일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열린 2019~2020시즌 주니어 그랑프리 6차 대회에서 우승하며 3차 대회에 이어 2대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선수가 주니어 그랑프리 2개 대회에서 연속으로 우승을 차지한 건 2005년 김연아 이후 14년 만이자 한국 선수로는 두 번째다. 김연아가 14세였던 2004~2005시즌 주니어 그랑프리에서 금메달을 딴 것처럼 이해인도 만 14세의 나이로 시상대의 가장 높은 곳에 서면서 가능성을 높였다.

이해인이 큰 관심을 모으는 것은 김연아의 현역시절과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김연아는 정확한 기술 구사 외에도 풍부한 표현력으로 연기를 펼쳐 고득점을 이끌어냈다. 이해인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기술을 깔끔하게 수행하면서 표현한다. 성장 속도도 매우 가파르다. 지난해 7월 주니어 데뷔 시즌을 치른 이해인은 그랑프리 데뷔전에서 개인 최고점인 180.48점으로 동메달을 목에 걸어 한국 선수 최연소 주니어 그랑프리 입상이라는 역사를 썼다. 트리플 악셀(3바퀴 반)이나 쿼드러플(4회전) 점프 등 고난도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날로 성장하고 있기에 미래가 더 밝다. 최근에는 트리플 악셀을 연습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이해인을 지도하고 있는 코치는 김연아의 주니어 시절 은사였던 지현정 코치다. 이해인은 지난해 김연아에게 직접 장학금을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지난 3월에는 김연아가 있는 올댓스포츠와 계약도 하며 한솥밥을 먹게 됐다.

이해인 외에도 성장하고 있는 또래 선수들이 있다. 위서영(도장중)은 지난달 열린 주니어 그랑프리 1차 대회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이어 2차 대회에서는 박연정(하계중)이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2022년 베이징 올림픽 주인공은
기존 트로이카와 세 명의 유망주들의 성장세에 특히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가 있다. 2022년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린다. 김연아를 바라보며 꿈을 키운 선수라면 올림픽 무대에 오르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는다. 이 선수들이 모두 성장해 자웅을 겨룬다면 한국 피겨계는 더욱 풍성한 재미를 품을 수 있다. 또한 선의의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시너지 효과로 성장하는 데 더욱 도움이 된다.

다만 고난이도 기술 장착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다. 최근 세계 여자 피겨에서는 남자 피겨의 전유물로만 알려졌던 쿼드러플 점프가 나오고 있다.

러시아, 미국 선수들은 이미 쿼드러플 점프를 뛰는 선수들이 많이 나왔다. 지난 9월 중순 이탈리아 베르가모에서 열린 ISU 챌린저 시리즈 롬바르디아 트로피에서는 러시아의 안나 쉬체르바코프가 현존 점프 중 가장 난도가 높은 쿼드러플 러츠를 성공하기도 했다. 이 대회에서 유영은 200점을 넘겼으나 쉬체르바코프를 비롯한 러시아 선수들에게 밀려 3위를 차지했다. 이처럼 기술 향상과 동시에 표현력을 높이면서 세계무대에서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다. 앞으로 3년의 시간 동안 누가, 얼마나 앞서나갈지 지켜보는 것도 팬들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김하진 스포츠부 기자 hj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