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FA 사전에 ‘블래터 몰락’이란 없다

블래터 회장을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후보라던 플라티니가 FIFA 회장직 도전을 포기한 상황에서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또 다른 후보인 미카엘 판 프라흐 네덜란드축구협회장이나 포르투갈 축구스타 루이스 피구도 블래터 회장을 위협하기엔 역부족이다.

“아직 내가 할 일이 남았으니….”

제프 블래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79·스위스)은 지난해 11월 재선에 도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미 1998년부터 17년째 세계 축구를 움켜쥐고 있는 그가 5선까지 노리겠다는 얘기다.

FIFA가 블래터의 왕국이 됐다는 비판이 흘러나왔지만, 아직 완성하지 못한 축구계 개혁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많은 이들이 코웃음칠 일이지만 6개월 만에 그 목표를 달성한 듯하다. FIFA 회장 선거가 열리는 5월 29일 스위스 취리히 FIFA 총회를 한 달여 앞두고 남미축구연맹과 아프리카축구연맹에서 공개적인 지지를 확보한 것이다.

스위스 시계 제조회사인 론진에서 일하던 블래터 회장은 1998년 주앙 아벨란제 전 회장의 뒤를 이어 축구계 정점에 올라 4년 임기의 회장 자리를 네 번 연속 지켰다. 2011년 6월 회장 선거에서는 91%의 압도적인 지지 아래 연임에 성공했고, 이번 선거도 이미 그의 승리가 유력하다.

제프 블래터 FIFA 회장(가운데)과 이사 하야투 아프리카축구연맹 회장(오른쪽)이 4월 7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아프리카축구연맹 총회 기자회견을 마친 뒤 자리를 뜨고 있다. / AP연합뉴스

남미·아프리카 지지로 5선 눈앞에
블래터 회장은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후보들과 달리 별다른 공약도 내놓지 않으면서 3·4월을 승리를 알리는 ‘봄날’로 만들었다. 지난 3월에는 남미축구연맹(10개국)의 지지를 받아냈고, 4월에는 6개 대륙축구연맹 가운데 가장 많은 회원국(54개국)을 자랑하는 아프리카축구연맹에서 투표를 약속받았다. 특히 이사 하야투 아프리카축구연맹 회장은 4월 8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아프리카축구연맹 총회에서 “아프리카축구연맹 54개 회원국은 만장일치로 블래터 회장에게 투표하기로 했다”는 공개 선언까지 했다. FIFA 회장 선거가 회원국 209개국의 투표로 결정된다고 볼 때 전체 표심의 3분의 1을 확보한 셈이다. 블래터 회장이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고 껄껄 웃을 만했다. AP통신이 “아프리카축구연맹 회원국 전체가 하야투 회장의 말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지만 아프리카축구연맹이 블래터 회장의 5선 도전에 든든한 기반이 될 것”이라고 평가할 정도다.

사실 블래터 회장은 최근까지 축구계를 떠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됐다. 2010년 12월 관례를 깨고 2018년 및 2022년 월드컵 개최지를 한꺼번에 발표하면서 검은 돈에 매수된 것이 아니냐는 공개적인 의혹에 시달린 탓이다. 지난해 6월 영국 일간지 ‘선데이타임스’는 이 의혹의 실체를 입증하는 폭로성 보도까지 내놓으면서 그를 구석에 몰아넣었다. 페어플레이를 외치는 FIFA가 비리의 온상이라는 걸 비판하는 광고까지 나왔다.

이 신문이 영국 하원 문화미디어 스포츠위원회에 제출한 문건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다. 카타르는 뭉칫돈뿐만 아니라 천연가스 무역을 무기로 활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세계 최대의 천연가스 생산기업 카타르 페트롤리엄을 이용해 태국 집행위원을 압박, 지지표를 요구한 것이다.

제프 블래터 FIFA 회장과 FIFA 집행위원들이 3월 19일 2019 FIFA 여자 월드컵 개최국을 알리는 회견을 마친 뒤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FIFA의 막대한 돈으로 불만 잠재워
2018년 월드컵 개최국 러시아도 표를 모으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은 똑같다.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미셸 플라티니 유럽축구연맹(UEFA) 회장의 환심을 사기 위해 피카소의 작품 한 점을 선물하는 한편, FIFA 부회장 출신으로 집행위원인 미첼 두기(벨기에)에게는 풍경화를 전달하는 수법으로 표를 모았다. 심지어 푸틴 대통령은 블래터 회장도 득표활동을 돕는 로비스트로 고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블래터 회장은 이 과정에서 스위스의 한 대학에서 강연에 나섰다가 학생들의 시위에 혼쭐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블래터 회장은 교묘한 방법으로 위기를 넘겼다. FIFA 윤리위원회 소속인 마이클 가르시아 수석조사관에게 2018년 및 2022년 월드컵 개최지 선정에 참가했던 모든 관련자를 조사하도록 지시한 뒤 이 보고서를 자신의 면죄부로 활용한 것이다. 가르시아 조사관은 비리 혐의자 75명의 인터뷰, 20만건에 달하는 서면 증거를 담은 430쪽 분량의 보고서를 FIFA에 제출했지만, FIFA는 단 42쪽으로 압축된 보고서만 공개하면서 “전체적인 시각으로 볼 때 개최지 재선정을 거론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했다”고 일축했다.

그 뒤에는 화려한 실적 발표와 화끈한 금품 살포가 잇따랐다. FIFA가 지난 3월 20일 공식 홈페이지에 게재한 ‘2014 재정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부터 4년간 수익만 57억1800만 달러(6조2204억원)에 달한다. 이는 FIFA의 2006~2010년 수익 41억8900만 달러(4조5715억원)보다 36.5% 상승한 수치다. 수익만 늘어난 게 아니다. 2014년 기준 FIFA 적립금 또한 15억2300만 달러(약 1조6620억원)를 확보해 전년도 대비 6.3% 늘렸다. 블래터 회장은 이 막대한 돈을 바탕으로 개발도상국을 지원하는 개발 관련 비용을 전체 예산의 20%로 끌어올렸다. 상대적으로 돈에 취약한 아프리카 축구계가 그를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배경이다. 또 자신에게 반발하던 유럽 축구계도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겨울 개최로 예상되는 피해액을 보상하겠다고 약속해 달래는 데 성공했다. 유럽 축구계는 비리의혹을 빌미로 또 다른 시한폭탄인 월드컵 후원금 공개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았다.

선거 경쟁자들이 블래터 이기기는 역부족
블래터 회장이 위기를 넘기면서 정권교체를 꿈꿨던 라이벌들의 도전도 힘을 잃어가고 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인물이 바로 블래터 회장의 비리의혹을 정면으로 겨냥했던 요르단 왕자 알리 빈 알 후세인 FIFA 부회장이다. 자신의 공약으로 ‘FIFA의 투명성 확대’를 선언했던 그는 마지막까지 블래터 회장을 붙잡고 늘어지겠다는 각오이지만, 이미 경쟁자로 보기는 어렵다. 가뜩이나 블래터 회장을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후보라던 플라티니 회장이 FIFA 회장직 도전을 포기한 상황에서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또 다른 FIFA 회장 후보인 미카엘 판 프라흐 네덜란드 축구협회장이나 포르투갈 축구스타 루이스 피구도 블래터 회장을 위협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판 프하르 회장과 피구는 각각 월드컵 본선 출전국을 40개국과 48개국으로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지만 현실성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이 때문인지 블래터 회장은 다른 후보들이 공약을 발표할 때 “17년간 FIFA 회장으로서 이뤄놓은 것이 내 공약”이라며 사실상 승리를 선언했다.

<황민국 경향신문 스포츠부 기자 stylelo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