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린의 뷰티풀 풋볼]K리그 초반 호령한 ‘윤정환의 신철퇴축구’

윤정환 감독은 지난해 12월 새롭게 울산 지휘봉을 잡았다. 윤 감독은 1·2라운드에서 ‘방패 든 니포 축구’와 ‘가볍게 휘두르는 철퇴축구’를 선보였다. 축구팬들은 윤 감독의 얼굴에 철퇴를 든 로봇을 합성해 ‘철퇴왕 2세’라 부르며 열광하고 있다.

‘꾀돌이’가 ‘괴물’로 변신해 K리그로 돌아왔다.

‘니폼니시 축구’와 ‘철퇴 축구’의 장점을 취합한 ‘윤정환 축구’가 올 시즌 초반 국내 프로축구 K리그 클래식에서 초반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윤정환 신임 감독(42)이 이끄는 울산은 지난 15일 ‘동해안 더비 맞수’ 포항을 4-2로 꺾었다. 지난 8일 개막전에서 서울을 2-0으로 누른 데 이어 2연승이다. ‘꾀돌이’(윤정환 감독 별명)가 ‘독수리’(최용수 서울 감독의 별명)를 잡은 데 이어 ‘황새’(황선홍 포항 감독의 별명)까지 포획했다. 아직 초반이라 섣부를 수 있지만, 축구팬들은 윤정환 감독의 얼굴에 철퇴를 든 로봇을 합성해 ‘철퇴왕 2세’라 부르며 열광하고 있다.

윤 감독은 현역 시절 ‘꾀돌이’, ‘제리’로 통했다. 1995년 K리그 부천(현 제주)에 입단한 그는 한국에서 보기 드문 테크니션이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과 2002년 한·일 월드컵에도 출전한 그는 플레이메이커로 송곳처럼 날카로운 패스를 찔러줬다. K리그에서만 44도움을 올렸다. 왜소한 체격(173㎝·63㎏)인 그는 남들보다 빨리 보지 않으면 안 됐고, 무시무시한 태클을 피하기 위해 원터치 패스를 하다 보니 패스의 질이 남달랐다.

3월 15일 경북 포항스틸야드에서 열린 K리그 클래식 울산 대 포항의 경기에서 포항을 4-2로 누른 울산 윤정환 감독이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최근 울산의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윤 감독은 2007년 사간도스(일본 J2리그) 선수 시절 도쿄 베르디전에서 있었던 일화를 들려줬다. “하프라인 밑에서 50m 넘는 침투패스를 찔러줬다. 잔디를 타고 일직선으로 쭉 갔고, 팀 동료가 골로 연결했다. 경기 후 헐크(29·현 브라질대표팀 공격수) 등 상대팀 선수들이 박수를 쳐줬다. 농구의 포인트가드처럼 골보다 어시스트가 더 좋았다. 실은 나도 패스미스를 종종했다. 강렬했던 패스만 팬들이 기억해주시는 것 같다.(웃음)”

일본 사가현(규슈) 동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인구 7만명의 작은 도시 도스. 1시간 거리의 후쿠오카시에 가려진 소도시로 우리나라의 전라남도 땅끝마을 같은 곳이지만 지금은 일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윤 감독이 이끌었던 사간도스 덕분이다. 윤 감독은 2011년 만년 2부리그팀 사간도스 지휘봉을 잡아 구단 역사상 첫 J1리그 승격을 이뤄냈다. 연봉 총액 51억원으로 이뤄낸 기적이었다. 2012년 강등 1순위 예상을 깨고 5위에 올랐고, 2013년 일왕배 4강행을 이끌었다. 2014년 8월 구단 측의 일방적 통보로 지휘봉을 내려놓을 무렵 팀은 J리그 선두였다.

현역시절 ‘꾀돌이’ 플레이메이커
‘선수 윤정환’과 달리 ‘감독 윤정환’은 사간도스에서 안정감 있는 수비를 우선시하는 실리축구를 했다. 부족한 살림살이 탓에 스쿼드가 엷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윤 감독은 “롱볼이 많았다. 전력상 한계가 있었다. 공격을 위한 수비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윤 감독은 “처음엔 선수들이 강팀을 무서워했다. 경기장을 찾은 팬들을 위해 승점 1점이라도 따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팀 감바 오사카에 전반에 0-2로 뒤지다가 3-2 역전승을 거둔 적도 있다. 일본 팬들이 기술적으로 떨어지지만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뛰는 모습을 좋아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2월 일본 오키나와에서 사간도스와 K리그 제주의 평가전을 지켜본 적이 있다. 당시 만난 일본 FBS 방송국의 도모키 다나카 기자는 “윤 감독이 이끄는 사간도스는 그렇게 센 팀은 아닌데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 사가현의 모습과 닮았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윤 감독이 키워 일본 국가대표에 뽑힌 도요타 요헤이는 “윤정환 감독님이 망나니 같던 나를 바꿔놓았다”고 존경심을 표했다.

윤 감독은 지난해 12월 새롭게 울산 지휘봉을 잡았다. 김광국 울산 단장은 “사간도스를 이끌며 실력을 검증받았다. 구단의 이미지 쇄신과 팀 성적 개선에 적격이라고 판단했다”고 선임 배경을 밝혔다.

윤 감독은 ‘니폼니시 축구’와 ‘철퇴축구’를 재해석해 자신만의 축구로 승화시켰다.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72·러시아)은 1994년부터 5년간 부천(현 제주)을 이끌며 윤정환을 중심으로 한 패스 축구, 이른바 ‘니포 축구’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윤 감독은 “상대 진영에 최대한 오래 머물러 우리 팀의 실점 위험도를 낮추는 니포 축구의 강점을 계승하되, 현대축구 흐름과 팀 사정을 감안해 수비를 좀 더 가미했다”고 말했다.

울산은 2012년 김호곤 전 감독 시절 견고한 수비 후 과감히 역습하는 ‘철퇴축구’로 아시아 챔피언스리그를 제패했다. 하지만 지난해 조민국 감독 체제에서 6위에 그쳤다. 윤 감독은 “사실 일본에서 오래 활동해 철퇴축구가 어떤 축구인지 거의 보지 못했다”면서 “전체적인 수비라인을 더 끌어올려 공수전환 속도를 높였다”고 말했다.

윤 감독은 성남에서 공격형 미드필더 제파로프(우즈베키스탄)를 영입했고, 임대됐던 수비형 미드필더 마스다(일본)를 불러들여 마지막 퍼즐을 맞췄다. 제파로프는 성남 시절 박종환 감독에게 “선수도 아니다”란 혹평을 들었고, 마스다는 조민국 전 울산 감독 시절 주전경쟁에서 밀려 오미야(일본)로 임대됐던 선수다.

니포축구와 철퇴축구의 장점 접목
윤 감독은 1·2라운드에서 ‘방패 든 니포 축구’와 ‘가볍게 휘두르는 철퇴축구’를 선보였다. 울산은 서울과의 개막전 전반 35분에 상대 진영에서 강력한 압박으로 볼을 가로챈 뒤 추가골을 만들어냈다. 제파로프가 골을 넣었고, 마스다는 중원의 지우개 역할을 해줬다.

윤 감독은 포항과의 2라운드에서는 1-1로 맞선 후반 11분 김신욱(196㎝)을 교체 투입해 양동현(186㎝)과 함께 두 명의 타깃형 스트라이커를 기용하는 파격 전술도 선보였다. 양동현과 김신욱은 나란히 골을 터트렸다.

윤정환 축구의 키워드는 ‘체력’이다. 사간도스 선수들은 훈련량이 유난히 많은 윤 감독을 ‘오니’(鬼·괴물 혹은 도깨비)라 불렀다. 윤 감독은 “한 선수가 훈련 중 이야기한 게 퍼졌다. 훈련을 강하게 시키긴 했다(웃음)”며 “패스축구도 체력 없으면 못한다. 패스축구는 가만히 서서 하는 게 아니라, 더 빨리 더 많이 뛰어 더 많은 볼을 소유해야 가능하다. 2014 브라질 월드컵 우승국 독일의 힘과 패스, 압박도 체력이 받쳐주니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윤 감독은 울산 지휘봉을 잡은 뒤 ‘공포의 삑삑이’라 불리는 셔틀런(왕복 달리기)을 하고, 전지훈련 기간 중엔 새벽운동도 시켰다. 단, 선수의 사생활은 철저히 자율에 맡긴다. 경기 전날 합숙도 없다.

현역 시절 ‘산소탱크’라 불린 박지성(35·은퇴)은 자신의 롤 모델로 둥가(53·브라질)와 윤정환을 꼽았다. “여느 한국 선수와 스타일이 다른 윤정환 선배가 부러웠다”고 말했다. 윤 감독은 ‘이상적인 선수’로 박지성을 언급했다. “지성이는 성실하고 체력이 좋다. 지성이처럼 효율적으로 뛰어야 한다”고 말했다.

울산 서포터스는 요즘 경기장에 윤 감독의 얼굴 밑에 ‘승리는 가장 끈기 있는 자에게 돌아간다’고 적힌 현수막을 건다. 윤 감독은 “아시안컵에서 투혼의 준우승을 거둔 축구대표팀처럼, 지더라도 팬을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축구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박린 일간스포츠 기자 rpark7@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