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린의 뷰티풀 풋볼]FIFA, 손바닥(42쪽)으로 하늘(420쪽) 가리기

비난 여론이 커지자 FIFA는 21일 러시아와 카타르 월드컵 유치 비리 의혹에 대한 조사 결과를 재검토하기로 했다. FIFA의 무혐의 결론이 번복될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숨긴 420페이지 보고서는 ‘판도라의 상자’일까.

2018년과 2022년 월드컵 개최지 선정 관련, 비리의혹이 불거지면서 전 세계 축구계가 벌집을 쑤셔놓은 듯 시끄럽다. FIFA가 지난 13일(한국시간) 2018년 러시아 월드컵과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유치 비리의혹에 대해 무혐의 결론을 내리면서, 조사 결과보고서 420쪽 가운데 42쪽의 요약본만 공개한 것이 문제가 됐다.

월드컵 개최지 선정을 둘러싼 비리의혹은 조사를 맡았던 마이클 가르시아 FIFA 윤리위원회 조사관이 총대를 메고 용감하게 세상에 알렸다. 가르시아 조사관은 FIFA가 무혐의 결론을 내리자 “지난 2년간 75명을 만나고 20만건의 서면자료를 첨부해 420쪽 분량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요약본은 엉터리”라고 즉각 반박했다. 그는 결과보고서 원본 공개와 함께 조사 재개를 FIFA 항소위원회에 요청했다. 각종 비리의혹이 밝혀지면서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결과보고서 내용 중 일부는 외신을 통해 공개됐다. 관련 보도에 따르면 2022년 월드컵 유치에 성공한 카타르는 2010년 앙골라에서 열린 아프리카축구연맹 총회 개최 자금을 댔다. 카타르의 모하메드 빈 함맘 전 FIFA 집행위원은 카리브해와 아프리카 축구계 고위 인사들에게 현금을 돌렸다. 2010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브라질-아르헨티나 평가전은 카타르가 아르헨티나축구협회에 자금을 주려는 행사였다고 지적됐다.

카타르와 경쟁했던 한국은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이 지구촌 축구 발전을 위해 7억7000만 달러(약 8500억원)의 기금을 조성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FIFA 집행위원들에게 보낸 것으로 나타났다.

마이클 가르시아 FIFA 윤리위원회 조사관(왼쪽)과 한스 요아킴 에케르트 FIFA 윤리위원회 심판관실 실장이 2012년 7월 스위스 취리히 FIFA 본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유럽 축구계 FIFA 집행부에 직격탄
일본은 FIFA 집행위원 등 고위 임원들과 부인들에게 카메라, 명품 가방을 돌렸다. 잉글랜드는 카리브해 축구 임원들에게 3만5000 파운드(약 6000만원) 상당의 식사를 대접했고, FIFA 집행위원의 친척에게 영국 내 일자리를 구해줬다. 2018년 월드컵 개최국 러시아는 FIFA 윤리위원회의 조사에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으며 지적을 회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FIFA는 월드컵 유치에 나선 국가들이 집행위원들에게 직접적 혜택을 주지 않았고, 월드컵 개최지 두 곳 선정 과정에서 일련의 걱정스러운 사건들이 있었지만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며 조사를 공식 종료했다.

당장 유럽 축구계가 FIFA 집행부에 직격탄을 날렸다. 레인하르트 라우발 독일 축구리그 회장은 “의혹이 은폐되면 유럽축구연맹(UEFA)이 FIFA에서 탈퇴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레그 다이크 잉글랜드 축구협회장은 “FIFA가 땅에 떨어진 신뢰를 회복하려면 원문 전체를 공개하라”는 내용의 서한을 FIFA 집행위원들에게 보냈다. 잉글랜드에서는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을 보이콧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영국 언론 텔레그래프가 ‘잉글랜드가 러시아 월드컵을 보이콧해야 하는가’에 대한 찬반투표를 진행 중인데 찬성이 90% 이상이다.

제프 블래터 FIFA 회장은 월드컵 개최지 선정 관련 비리를 숨긴다는 지적을 부인했다. 블래터 회장은 19일 FIFA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우리에게는 숨길 것이 전혀 없다. FIFA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했으며, 남은 일은 독립된 외부기관이 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블래터 회장은 “내부 기밀문건을 공개하는 건 FIFA의 규정은 물론, FIFA 본부가 위치한 스위스 법에도 어긋난다”며 보고서 원본 공개를 거부했다.

대신 FIFA는 요약본 보고서에 소개된 일부 비리혐의자에 대해 19일 스위스 검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FIFA는 성명을 내고 “가르시아 담당관의 조사 결과 불법행동이 의심되는 사람들에 대해 법적 처벌절차를 밟으려는 것”이라면서 “불법행위 의심자들 중 일부는 국제적인 자금 거래 행위까지 밝혀내야 하는 만큼, 사법당국에 수사를 맡기는 게 합리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축구계 인사들은 “보고서 원본 공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궁지에 몰린 FIFA가 물타기를 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20일 조사과정에 참여했던 내부고발자가 살해 위협에 시달린다는 사실이 공개되면서 논란은 증폭됐다. 영국 스포츠전문채널 <스카이스포츠>는 “2022년 월드컵 개최지 선정 과정에서 발생한 비리에 대해 증언한 내부고발자 파에드라 알 마지드가 신변에 위협을 느껴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영국 “월드컵 보이콧” 90% 이상 찬성
알 마지드는 가르시아 조사관에게 월드컵 개최지 선정 비리를 털어놓은 75명의 증인 중 한 명이다. 그는 각종 문서와 데이터, 녹음파일 등 관련 자료를 함께 제출해 비리를 입증하는 데 기여했다. 알 마지드는 “얼마 전 FBI 요원들이 찾아와 누군가가 나와 내 가족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렸다”면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공포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비난여론이 커지자 FIFA는 21일 러시아와 카타르 월드컵 유치 비리의혹에 대한 조사 결과를 재검토하기로 했다. FIFA는 조사 결과를 재검토하기로 한 윤리위원회 조사관실과 심판관실의 회의 결과를 인정한다고 밝혔다. 가르시아 조사관과 조사 결과를 발표한 에케르트 심판관실 실장은 20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만나 조사보고서를 재검토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FIFA는 감사·준법감시위원회 위원장이 이들의 업무를 평가하고 관련한 조치를 결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에케르트 실장은 가르시아의 420페이지짜리 보고서를 토대로 러시아와 카타르의 월드컵 유치에 문제가 없다는 취지의 42쪽짜리 요약본을 발표했지만 축소·왜곡 논란이 일었다. 가르시아 조사관은 에케르트 실장의 요약본이 사실과 결과를 왜곡했다며 FIFA에 이의를 제기했다.

FIFA의 무혐의 결론이 번복될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FIFA가 비난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형식적 연출이라고 보고 있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21일 “2022년 월드컵 유치경쟁에서 잉글랜드도 흠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대중과 언론 모두 FIFA를 크게 비판하고 있다. 차라리 잉글랜드가 자랑스러울 정도”라며 “FIFA는 현재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조직이다. 국제적 영향력이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을 능가하지는 못하더라도 동급은 된다. 권력구조 측면에서 FIFA는 북한도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보도했다. 전 세계 언론과 대중이 FIFA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느 때보다 차갑다.

<박린 일간스포츠 기자 rpark7@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