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한국인 프리미어리거는 없다?

EPL 쇄국정책 시행안에 따르면 FIFA 랭킹이 최소 50위 이내에 들어야 취업비자를 신청할 수 있다. 그런데 2014년 9월 현재 한국의 랭킹은 63위에 불과하다.

영국이 요즈음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야단법석이다. 잉글랜드가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56년 만에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은 뒤 축구 종가의 부활을 위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 외국인 선수의 영입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은 까닭이다. 자국 선수들이 경기에 나설 기회를 얻을수록 잉글랜드 축구가 강해질 것이라는 논리다. 실제로 잉글랜드축구협회(FA)는 8년 뒤인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우승을 목표로 2015~2016 시즌부터 쇄국정책의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EPL에서 쇄국정책이 추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6년 전인 2008년 잉글랜드가 유로2008 예선에서 탈락해 본선에 진출하지도 못하면서 한 차례 거론됐던 정책이다.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총리가 직접 나서 “EPL에 영국 출신 선수 비율을 늘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한 차례 태풍이 휘몰아쳤다. 당시 브라운 총리는 영연방(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 출신을 제외한 모든 선수들을 용병으로 분류해 보유 및 출전을 제한하길 원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유럽연합(EU) 내 노동자들(선수 포함)이 유럽 어느 곳에서든 차별받지 않고 자유롭게 일할 수 있다’는 유럽 통합의 기본 취지와 배치돼 좌절됐다.

이 때문에 FA의 새로운 쇄국정책은 EU 출신을 제외한 나머지 국적을 가진 선수들의 출전을 제한하는 쪽으로 짜여지고 있다. 예컨대 이탈리아나 프랑스 출신 선수들은 쇄국정책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10년 사이 EPL의 한 축으로 떠오른 아프리카와 아시아 출신들을 타깃으로 삼은 정책인 셈이다. FA는 이번 정책으로 외국인 선수가 크게 감소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렉 다이크 FA 의장은 “최근 4년간 EPL에 입성한 EU 출신이 아닌 외국인 선수는 122명인데, 새 정책을 도입하면 절반은 뛸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EU 출신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 제한
FA가 추진하고 있는 EPL 쇄국정책은 이미 시행안까지 만들어졌다. 기본 골자는 ‘EPL 수준을 높일 수 있는 외국인 선수의 영입은 허용하되, 자국의 어린 선수를 위협할 수 있는 유망주 수준의 선수는 거부한다’이다. 이를 위해 FA는 영국 정부와 협의를 통해 취업비자 발급을 까다롭게 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EPL은 외국인 선수가 취업비자를 받지 못하면 뛸 수 없다.

먼저 취업비자 신청을 EPL만 가능하도록 바꿨다. 2부리그인 챔피언십 팀들은 아예 EU 출신이 아닌 선수들을 데려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흔히 하부리그가 선수를 육성하는 기능을 담당하는데, 무조건 자국 선수를 키우라는 얘기다. 지난 4년간 취업비자를 받아 하부리그에 입단한 외국인 선수는 23명이었다.

또 선수가 취업비자를 신청하려면 출신 국가의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이 최소 50위 이내에 속해야 가능하게 됐다. 종전 정책에선 70위 이내면 됐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겨냥한 조치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2014년 9월 현재 FIFA 랭킹이 50위 이내인 아시아 국가는 이란(44위)과 일본(48위)뿐이다. 그나마 아프리카는 알제리(20위)와 코트디부아르(22위) 등 11개국이 50위 안에 포함됐지만, 그렇지 않은 국가가 그 이상으로 많다.

안 그래도 구단 간 협상을 마쳐도 취업비자를 받지 못해 이적이 불발되는 일이 잦았던 EPL에서 그 강도를 더욱 높이겠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EPL 입성의 또 다른 걸림돌이었던 최근 2년간 A매치 출전 비율을 75%에서 30%로 줄였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몇 가지 예외조항을 만들었다. 이적료가 1500만 파운드(약 257억원) 이상이면 예외적으로 취업비자를 내줄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단, 이렇게 데려온 선수는 임대를 보낼 수 없도록 제한해 그야말로 최고 수준의 선수가 아니라면 EPL에 입성하지 못하도록 만든 셈이다.

EPL 쇄국정책은 한국에도 큰 타격을 줄 전망이다. 박지성(33)이 2005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한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한국 선수들이 EPL에서 명예와 부를 동시에 누렸다. 박지성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이영표(37·토트넘 핫스퍼)와 설기현(36·울버햄튼)을 넘어 2013년 EPL에 입성한 김보경(25·카디프시티)이 어느덧 12호 한국인 프리미어리거가 됐다. 그러나 이번 정책이 실효화된다면 더 이상 EPL에서 새로운 한국 선수가 활약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2부리그 챔피언십 진출은 불가능
9월 18일 FIFA가 발표한 한국의 FIFA 랭킹은 63위에 불과해 한국 선수의 경우 이적료를 1500만 파운드 이상 지급하려는 구단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적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한국인 선수가 EPL에서 기록한 최고 이적료는 2012년 셀틱에서 스완지시티로 이적한 기성용(25)의 600만 파운드(약 103억원)였다. 박지성이 맨유에 입단할 당시의 이적료 또한 400만 파운드(약 68억원)에 불과했다. EPL 우회 입성의 길이 끊긴 것도 아쉽기만 하다. 김보경은 2012년 챔피언십에 속해 있던 카디프시티에 입단했으나 이듬해 소속팀이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하면서 EPL 선수가 됐다. ‘신의 한 수’로 평가받는 그의 성공 이후 수많은 한국 선수들이 챔피언십도 이적의 대상으로 여겨왔던 상황에서 이번 쇄국정책은 큰 실망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쇄국정책이 또 다른 바람을 일으킬 수도 있다. 최근 EPL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는 독일 분데스리가가 새로운 꿈의 무대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미 손흥민(22·레버쿠젠)을 비롯해 구자철(25)과 박주호(27·이상 마인츠), 지동원(23·도르트문트), 홍정호(25·아우크스부르크), 김진수(22·호펜하임) 등 6명의 선수가 뛰고 있는 상황에서 다분히 가능성이 높은 얘기다.

<황민국 경향신문 스포츠부 기자 stylelo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