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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환, 지구력·잠영 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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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m 마지막에 보여준 놀라운 지구력과 스피드, 200m 마지막 턴 동작에서 보여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잠영거리는 박태환의 올 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굴 비장의 무기다.

박태환(23·단국대)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겉으로는 조용해 보이지만 물밑으로는 런던 올림픽에 대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다. 박태환이 변함없이 밝히고 있는 목표는 금메달이 아닌 세계신기록. 그 목표를 향한 소리없는 움직임이 계산되고 이뤄지고 있는 모양새다.

박태환은 지난 2월 12일 호주에서 끝난 뉴사우스웨스트 스테이트 수영선수권대회에서 남자 자유형 200m, 400m, 1500m에서 1위로 골인했다. 특히 그동안 집중하지 않았던 1500m에서 14분47초38의 한국신기록을 세웠다. 무려 6년 동안 스스로 깨지 못하던 기록이었다. 종전 기록은 박태환 자신이 2006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기록한 14분55초03이었다.

박태환이 2011년 12월 28일 한체대 수영장에서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훈련을 하고 있다. | 이석우 기자

박태환이 2011년 12월 28일 한체대 수영장에서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훈련을 하고 있다. | 이석우 기자

1500m는 완벽했다. 1500m를 수영하는 동안 거의 모든 구간을 일정한 페이스로 유지했다. 특히 마지막 50m는 무려 25초92에 들어왔다. 육상으로 치자면 1만m에 해당하는 장거리 종목에서 마지막 50m를 26초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굉장한 기록이다. 1500m 세계신기록 보유자인 중국의 쑨양이 2011 상하이 세계선수권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울 때 사력을 다해 기록한 마지막 50m 구간 기록 25초94보다 오히려 0.02초 더 빨랐다.

1500m 끝까지 안정된 페이스
이날 레이스를 지켜 본 SK스포츠단의 권세정 매니저는 “굉장히 안정적인 수영이었다”고 말했다. 이전 대회에서 박태환이 보여준 1500m 레이스는 레이스 중반 허우적대는 모습이 보일 정도로 페이스가 일정하지 않았다. 주로 200m와 400m에 집중하면서 나온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번 1500m는 이전과 달라졌다. 그만큼 박태환의 지구력이 완성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박태환 스스로도 1500m 기록에 만족해 했다. 박태환은 2월 13일 귀국 기자회견에서 “훈련의 일환으로 참가한 종목이었지만 좋은 기록이 나와 좋다”고 말했다.

박태환이 2월 13일 호주 전지훈련을 마치고 일시 귀국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박태환이 2월 13일 호주 전지훈련을 마치고 일시 귀국하고 있다. | 연합뉴스

사실 이날 박태환의 전담 코치인 마이클 볼 코치는 1500m 종목 참가를 반대했다. 다른 종목에서 좋은 결과를 얻은 만큼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특히 이날 대회 일정은 가장 짧은 종목인 자유형 50m와 가장 긴 종목인 1500m가 함께 열리도록 돼 있었다. 자칫 페이스가 흐트러질 위험이 있었다. 박태환이 1500m 출전을 고집하자 볼 코치는 50m 출전을 말렸다. 그러나 박태환은 둘 모두 출전했고 두 종목 모두에서 좋은 기록을 세웠다. 박태환은 50m에서도 22초74를 기록해 개인 최고기록에 0.01초만 뒤졌을 정도로 경기 초반 스피드도 만만치 않게 향상됐음을 보여줬다.

박태환은 “50m를 마친 뒤 1500m까지 시간이 많지 않았다. 겨우 몸을 약간 풀어두고 경기에 나서야 했다”면서도 “어쩌면 50m를 뛰느라 심박수가 높아져 있었던 게 좋은 기록에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겠다”며 웃었다.
박태환이 1500m 마지막에 보여준 25초92의 기록은 박태환의 지구력이 완성됐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올림픽을 준비하는 수영 선수의 훈련 스케줄은 우선 경기 후반에 필요한 지구력을 꾸준히 향상시킨 뒤 실제 대회 2~3개월 전부터 ‘스피드-지구력’이라 부르는 속도와 지구력이 결합된 형태의 훈련을 강화한다. 박태환도 아직까지 스피드-지구력 훈련에 돌입한 상황은 아니지만 이미 지구력이 상당히 올라왔다는 점은 충분히 긍정적인 신호다.
그러나 박태환의 세계신기록을 향한 ‘비밀 병기’는 향상된 지구력이 아니라 200m에서 보여준 ‘잠영 거리’다.

박태환은 이번 대회 자유형 200m에서 1분46초78을 기록하며 1위에 올랐다. 자신의 종전 최고기록인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1분44초80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마지막 150m를 지난 뒤 턴 동작에서 박태환은 지금까지 보여주지 못했던 엄청난 잠영 거리를 선보였다. 박태환은 “완전히 물에 빠져서 못 나오는 줄 알았다. 수영 선수가 익사할 뻔했다”며 웃었지만 레이스를 지켜 본 SK 스포츠단 관계자들은 “무려 10m나 잠영으로 나아갔다”고 말했다.
짧은 잠영 거리는 지금까지 박태환의 약점으로 지적된 부분이다. 과거 훈련을 통해 7m까지 늘린 적은 있었지만 그 이상은 진전이 부족했다. 그러나 이번 대회에서 잠영 거리를 획기적으로 늘렸다.

잠영거리 10m까지 늘려

박태환의 오른쪽 허리에 새겨진 오륜기 문신이 눈길을 끈다. | 경향신문

박태환의 오른쪽 허리에 새겨진 오륜기 문신이 눈길을 끈다. | 경향신문

잠영 거리 확대는 200m의 가능성을 높여주는 대목이다. 런던 올림픽 200m 라이벌은 독일의 파울 비더만, 미국의 마이클 펠프스, 라이언 록티 등이다. 마이클 볼 코치에 따르면 이들과의 경쟁에서 핵심은 마지막 50m에 달렸다. 마지막 턴에서 물 속에서 나왔을 때 머리 이상 뒤지면 제 아무리 박태환의 막판 레이스가 좋아도 따라잡기 힘들다. 이들의 키와 추진력을 얻는 발 크기 등 신체조건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다만, 잠영 거리를 늘려 같은 수준에서 물 위로 올라와 마지막 스퍼트를 한다면 박태환에게 승산이 있다는 계산이다. 펠프스와 록티 등 라이벌의 잠영 거리가 바로 10m 수준이다. 박태환도 같은 거리로 잠영 거리를 늘렸다.

잠영 거리가 길면 그만큼 수면 저항을 덜 받는다는 장점이 있다. 수면 저항은 수중 저항과 달리 물 표면과 공기 저항을 동시에 받기 때문에 오히려 수중 저항보다 더 세다. 잠영 거리가 길면 그만큼 물 속 깊에 내려갔다 올라오기 때문에 올라오는 순간 강한 부력의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2연패뿐 아니라 2관왕 가능성
박태환은 2차 전지훈련 성과에 대해 “성실히 훈련을 했고 그만큼 성과가 나온 것 같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담담함 속에 예상보다 훨씬 큰 성과가 숨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1500m 마지막에 보여준 놀라운 지구력과 스피드, 200m 마지막 턴 동작에서 보여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잠영 거리는 박태환의 올 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굴 비장의 무기다.

박태환은 3차 전지훈련을 마친 뒤 캐나다와 미국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한다. 이번 호주 대회와 달리 잠재적 경쟁자들이 더 많이 출전할 것으로 보인다. 그때 박태환이 이번 호주 대회만큼의 능력을 보여준다면 북미 대륙 단거리 수영 선수들의 긴장감을 더욱 높이게 된다.

박태환의 잠영 거리는 200m 종목의 기대감을 높였고 1500m에서 보여준 지구력은 400m 종목의 가능성을 높였다. 섣부른 기대감일 수도 있지만 박태환에게 거는 기대는 올림픽 2연패가 아니라 사상 첫 수영 올림픽 2관왕이다. 박태환의 목표는 물론 금메달이 아니라 세계신기록이다. 그 목표 또한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용균 경향신문 체육부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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