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독일 ‘나치 피해 배상’ 공방전

나치의 그리스 점령은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 가려 이제까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독일의 부채상환 압박을 받고 있는 그리스 정부가 “독일이 우리에게 진 빚은 더 크다”면서 나치의 전쟁범죄를 배상하라고 거꾸로 역공을 가하고 있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2시간 동안 차를 타고 달리면 디스토모라는 도시가 나온다. 이곳 주민들은 1944년 6월 10일을 잊지 못한다. 그날은 독일 나치군이 218명의 주민들을 대학살한 날이었다. 루카스 지시스 부시장(48)은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단 한 번도 그날의 학살을 잊은 적이 없다고 독일 언론 슈피겔에 말했다.

수십년 동안 디스토모의 주민들은 당시 나치가 저지른 잘못을 배상받기 위해 법정 싸움을 벌여왔다. 2000년 그리스 대법원은 독일 정부가 피해 유족들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독일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지시스는 “우리는 지금까지도 독일이 판결을 이행해주길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나치의 그리스 점령은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 가려 이제까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독일의 부채상환 압박을 받고 있는 그리스 정부가 “독일이 우리에게 진 빚은 더 크다”면서 나치의 전쟁범죄를 배상하라고 거꾸로 역공을 가함에 따라, 독일의 과거사가 다시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 1월 총선에서 승리한 급진좌파연합 시리자 소속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나치 범죄는 여전히 우리 기억에 생생하지만 독일은 제대로 배상한 적이 없다”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에서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질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치프라스는 지난 1월 26일 총리 취임선서를 마치자마자 그리스 레지스탕스(저항군) 추모비를 찾아, 독일과 그리스 간에 과거사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리스 신전 앞에 나치 깃발을 올리고 있는 나치군들. / 인터넷 자료사진

냉전구도 속 배상 책임 흐지부지 면제
그리스가 나치 피해배상 문제를 본격 제기하기 시작한 것은 2012년 보수우파인 신민당 정권 시절부터다. 당시 신민당 정부는 그 해 9월 독일에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실무단을 구성해 구체적인 피해배상액 산정작업을 실시했다. 치프라스는 지난 총선 때 아예 배상문제를 공약으로 들고 나왔다. 혹독한 구제금융으로 그리스의 목줄을 잡아쥐고 있는 독일로부터 거꾸로 배상금을 받아내겠다는 복안이었다.

디미트리스 마르다스 그리스 재무장관은 지난 7일 “2차대전 당시 문헌과 기록 등을 토대로 집계한 결과 독일은 그리스에 모두 2790억 유로(332조3000억원)를 배상하라”고 공식 요구했다. 이 액수는 신민당 정부가 내부적으로 계산한 1620억 유로보다 훨씬 큰 금액이다. 또 그리스가 트로이카(국제통화기금·유럽중앙은행·유럽연합)에 갚아야 할 구제금융 총액인 2460억 유로(292조6000억원)보다도 많다.

그리스는 나치 점령 기간 사회간접시설 파괴 등 경제가 초토화돼 1080억 유로의 피해를 봤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번 배상액 산정에는 나치가 그리스 중앙은행으로부터 무이자로 강탈해간 4억7600만 라이히스마르크가 포함돼 있다. 이는 현재 가치로 따지면 103억 유로에 해당하는 액수다. 그리스 정부는 이 금액을 산출하기 위해 그리스 중앙은행의 기록보관소에 있는 5000여장의 문서들을 무려 5개월에 걸쳐 꼼꼼히 검토했다. 여기에 나치가 훔쳐간 각종 유물 반환 액수 등도 포함됐다.

반면 독일은 그리스의 배상 요구를 상대할 가치가 없는 주장이라며 일축하고 있다. 1953년 런던 부채협정에 따라 이미 모든 배상절차는 마무리됐고 독일이 져야 할 법적 의무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입장이다. 앙겔라 메르켈 정부는 그리스 정부가 과거사 문제를 구제금융 협상의 지렛대로 삼으려는 것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나타내고 있다. 지그마르 가브리엘 부총리 겸 중도좌파 사민당 당수는 “독일이 그리스에 배상금을 지불할 가능성은 제로”라고 단언했다.

독일에 전후 배상을 요구하고 있는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 / AP연합뉴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 AP연합뉴스

엇갈리는 양쪽 주장을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2차대전 직후 독일의 전후 배상 문제가 어떻게 처리됐는지부터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 등 연합국들은 1차대전 때와 달리 독일의 배상금 문제에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1차대전 후 패전국이었던 독일에 부과한 1320억 마르크의 무리한 배상금이 결국 독일 국민들의 분노를 키워 나치라는 괴물을 탄생시켰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 와중에 동·서 냉전구도가 형성되면서 독일에 대한 배상금 문제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서방은 1953년 서독과 ‘런던 채무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의 핵심은 나치에게 피해를 입은 국가와 개인에 대한 공식 배상을 사실상 동·서독 통일 이후까지 면제해준 것이다. 같은 해 8월, 이번에는 소련이 같은 공산국가인 동독과 배상 면제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1990년 동·서독 통일이 이뤄진 후에도 배상문제는 다시 거론되지 않았다. 그 해 9월 동·서독과 미·영·프·러 간 ‘2+4 조약’이 체결됐는데 이는 사실상 독일의 전후 배상 책임을 면제해준 런던 채무협정을 재확인한 것에 불과했다.

독일은 런던 채무협정으로 공식적인 배상금 책임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동안 과거사 정리 차원에서 꾸준히 피해자에게 보상작업을 진행해 오기는 했다. 1960년 그리스와 협정을 맺고 1억1500만 마르크의 보상금을 지불하는 한편, 프랑스에 4억 마르크, 오스트리아에 9500만 마르크를 건넸다. 하지만 그리스 정부는 나치가 약탈해간 재산에 비해 1억1500만 마르크의 배상액은 터무니없이 적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 주민 수백명이 대학살을 당했던 그리스 디스토모의 주민들은 지금까지 아무런 피해도 배상받지 못했다.

시험대에 오른 독일의 글로벌 리더십
국제법 전문가들은 독일의 전후 배상문제는 이미 끝난 이야기이며, 독일이 그리스에 배상해줘야 할 법적 의무가 없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의 전후 처리가 정치적으로나 법적으로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보는 시각도 상당하다. 독일 내부에서조차 이 기회에 배상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연정에 참여하고 있는 사민당의 중진 랄프 슈테그너 의원은 “우리는 배상문제를 논의해야만 한다. 수십년이 지났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국제적 법률문제가 남아 있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유럽 재정위기 이후 독일은 홀로 승승장구하며 경제대국의 입지를 굳힌 반면, 재정위기 국가들에는 가혹한 긴축재정을 강요해 비난을 사왔다. 이 때문에 그리스에서는 과거 나치는 총을 앞세웠지만, 지금 메르켈 정부는 은행과 금융기관을 앞세워 그리스를 침략하려 한다는 반발이 고조되고 있다. 메르켈 총리가 아돌프 히틀러에 이어 ‘제4제국’ 건설을 꿈꾼다는 견제의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고 슈피겔은 전했다. 독일이 유럽연합 내에서 새로운 글로벌 리더십으로 자리 잡은 가운데, 그리스 구제금융 협상과 맞물린 이번 과거사 문제는 독일을 새로운 시험대에 올려놓을 전망이다.

<정유진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sogun77@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