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 바뀐 사우디, 이란 견제가 과제

이란을 견제해왔던 사우디가 흔들리면서, 최근 이라크와 시리아로 이어지는 ‘시아파 벨트’를 형성하며 영향력을 확대해온 이란이 사우디의 코앞에 있는 예멘과 바레인까지 손아귀에 넣을 가능성이 커졌다.　

“사우디아라비아를 개혁한 예리한 권력자.” 1월 23일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평가했다. 압둘라 국왕은 폐렴으로 지난해 말부터 입원치료를 받다가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왕세제(왕위를 잇는 왕의 아우)였던 압둘라의 이복동생 살만(79)이 왕위를 물려받게 됐다. 관례에 따라 사우디에서는 이날 곧바로 장례가 치러졌고, 왕위 승계는 정해진 대로 빠르고 순조롭게 이뤄졌다.

왕위 승계과정은 순조로웠지만 파장은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수니파 아랍국가들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사우디의 권력교체는 중동의 역학관계를 크게 뒤흔들 수 있다. 사우디가 불안정한 틈을 타 시아파 맹주국인 이란이 역내에서 영향력 확대에 나설 가능성이 커졌다. 사우디 왕실 내 권력다툼도 심각해질 수 있다.

여성 참정권 허용한 신중한 개혁가
압둘라는 현대 사우디 건국의 아버지인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전 국왕의 열 번째 아들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압둘라의 어머니 파하다 빈드 아지알 쉬라임은 알사우드 가문과 경쟁관계에 있던 유력 부족장의 딸로 압둘라가 6살 때 세상을 떠났다. 아들들에게 관대한 아버지가 아니었던 압둘아지즈는 정략결혼 상대였던 파하다의 아들인 압둘라를 특별히 아끼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형제들이 10대 때부터 요직을 차지한 것과 달리, 왕실 권력기반이 약했던 압둘라는 리야드의 왕실이 아닌 사막에서 베두인 유목민들과 전통적인 부족생활을 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압둘라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이미 30대 후반에 접어든 1962년 사막 부족들의 존경과 충성을 바탕으로 사우디방위군 사령관에 임명된 이후의 일이다.

압둘라는 1982년 이복형인 파드 전 국왕이 왕위에 오른 뒤 왕세제로 책봉됐고, 1995년 파드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에는 국왕 대행을 역임, 사실상 20년 동안 절대왕정 국가인 사우디를 통치했다. 그는 ‘신중한 개혁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재위 첫해에는 사우디 역사상 최초로 직접선거를 실시해 지방행정자문회의 위원들을 선출했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여성 권익을 조금이나마 확대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압둘라는 여성의 공직 진출을 허용하고 고위직에 여성을 기용했다. 아랍의 봄 이후 2011년에는 여성 참정권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2012년에는 런던 올림픽에 여성 선수를 출전시켰다. 교육과 경제에도 투자했다. 젊은 인재들이 서구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국가장학금 제도를 만들어 학생 7만여명이 혜택을 봤다. 외국 기업들을 유치하고자 행정절차를 간소화했고, 태양광발전이나 여행·광산 등 강점이 있는 산업분야를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친미 독재자인 압둘라의 개혁은 역설적으로 자국 내 민주주의 요구를 억누르기 위한 것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압둘라는 혁명을 매우 싫어했다”고 썼다. 아랍의 봄 국면에서 사우디가 예외였던 것은 풍부한 석유에 기반한 풍족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압둘라가 느리고 제한적인 개혁으로 민주주의 요구를 틀어막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압둘라는 이슬람 극단주의의 발호를 크게 우려했고, 이집트에서 군부 출신인 압델 파타 엘시시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무슬림형제단을 저지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의 범위는 늘 최소한이었다. 여성에게 투표권은 줬지만 사우디에는 의회민주주의가 없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성의 자동차 운전을 금지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사형과 태형, 신체절단형 같은 전근대적 형벌도 여전히 존재한다.

2010년 11월 압둘라 당시 국왕(왼쪽)이 미국 방문을 떠나기 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살만 당시 왕세제(오른쪽)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 AP연합뉴스

새 국왕도 고령, 왕위계승 경쟁 전망
사우디의 앞날은 새로 즉위한 압둘라의 이복동생 살만 국왕이 책임지게 됐다. 살만은 압둘아지즈의 총애를 받았던 하사 알 수다이리 왕비가 낳은 7형제 중 여섯째 아들이다. ‘수다이리 세븐’이라고 불리는 일곱 왕자들은 압둘아지즈 사후 사우디 왕실 권력의 중심에서 개혁에 저항하고 부패를 일삼았다. 첫째 파드는 5대 국왕으로 20년 넘게 재위했고, 둘째 술탄과 넷째 나이프는 왕세제 자리에 있다가 사망했다. 왕세제였던 살만이 이번에 왕위에 오르면서 수다이리 세븐 중 두 명이 왕좌를 차지하게 됐다.

살만의 사우디는 당분간 기존의 국정기조를 이어나갈 것으로 보인다. 살만은 지난해부터 압둘라가 고령과 지병으로 국정을 운영하기 어려워지자 사실상 국왕의 역할을 대신해 왔다. 압둘라에 비해 보수적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개혁기조를 되돌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 평가다.

문제는 대외관계다. BBC는 “살만은 매우 어려운 시기에 왕위에 올랐다”고 평가했다. 사우디 남쪽 국경과 접한 예멘에서는 최근 시아파 반군의 쿠데타가 일어나 수니파 대통령이 쫓겨났다. 킹 파드 다리로 연결된 섬나라 바레인은 취약한 수니파 왕정이 시아파가 대다수인 국민들을 지배하고 있다. 이란을 견제해 왔던 사우디가 흔들리면서, 최근 이라크와 시리아로 이어지는 ‘시아파 벨트’를 형성하며 영향력을 확대해온 이란이 사우디의 코앞에 있는 예멘과 바레인까지 손아귀에 넣을 가능성이 커졌다. 알자지라는 “사우디 새 국왕의 최대 과제는 이란의 영향력을 막는 일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압둘라가 억눌러 왔던 수니파 무장단체들의 준동을 막는 일도 관건이다. 사우디의 부유한 근본주의자들은 이슬람국가(IS)와 알카에다 등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에 물밑에서 자금을 대고 있다. 살만이 이 자금줄을 틀어막지 못하고 무장단체에 강력 대응하는 데도 실패한다면 극단세력이 더욱 기승을 부릴 수 있다. 이란의 부상과 무장단체들의 준동이라는 국면에서 사우디는 미국 의존도를 더 높일 가능성이 크다.

대내적으로는 압둘라계와 수다이리계로 갈라진 왕실에서 왕위 계승 다툼이 벌어질 가능성도 점쳐진다. 살만은 이미 80세에 가까운 고령이며 건강도 좋지 않기 때문에 외신들은 압둘라가 입원한 뒤부터 이미 ‘포스트 압둘라’를 넘어 ‘포스트 살만’을 점쳐 왔다. 압둘라는 생전에 왕위 계승서열 2순위에 막내 이복동생인 무크린(69)을 지명했다. 하지만 무크린의 어머니는 예멘 출신으로 압둘아지즈와 정식 결혼한 적이 없어 정통성 문제가 있다. 이 때문에 압둘라가 무크린을 서열 2순위에 앉힌 것이 형제 계승 전통을 지키면서도 자기 아들을 왕좌에 앉히려는 포석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었다. 만약 무크린이 살만에 이어 즉위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무크린 이후에는 3세대가 왕위를 승계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현재 차차기 권력에 가장 가까이 다가왔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은 압둘라의 3남인 무타입과 사망한 나이프 왕세제의 차남인 무함마드다. 압둘라는 2010년 국가방위군 사령관직을 무타입에게 물려줘 신임을 표현했다. 무함마드는 2012년 압둘아지즈 손자 세대 중에서는 최초로 왕위 승계와 직결된 요직인 내무장관에 올랐다.

<남지원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somni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