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터키의 푸틴’ 집권연장 초석 다지다

12년 동안 터키 총리직에 있었던 에르도안이 4연임 금지규정에 가로막히자 방향을 바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해 장기집권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오늘 승리한 것은 나 에르도안이 아니라 국가 의지, 그리고 민주주의입니다. 국민들의 직접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함으로써 오늘 위대한 터키는 다시 한 번 승리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한 시대를 닫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것입니다.”

지난 10일 터키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치러진 직선제 대선에서 현직 총리이자 집권 정의개발당 당수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60)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터키 선거관리위원회 집계 결과 에르도안은 과반인 51.79%를 득표해 2차 투표를 치르지 않고 당선을 확정했다. 야권 단일 후보인 에크멜레딘 이흐산오울루는 38.44%, 쿠르드계 좌파 후보인 셀라하틴 데미르타시는 9.76%를 득표했다. 에르도안은 오는 28일 취임한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당선자가 지난 10일 터키 수도 앙카라에서 당선을 축하하는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들어 답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권위주의’ 비판에도 경제성장 공로
그의 당선은 선거 전부터 기정사실에 가까웠다. 에르도안이 이끄는 정의개발당은 지난 3월 지방선거에서 야당에 크게 승리했고, 에르도안 자신도 대선 기간 내내 50%를 넘는 지지율을 굳건히 유지했다. 에르도안은 터키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저소득층·무슬림·노동자 계층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다. 지지자들은 그를 터키를 건국한 국민 영웅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 비교하기도 한다.

에르도안은 총리 재임 기간 중 권위주의적 통치로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지난해부터 이스탄불에서 벌어진 반정부시위를 강경 진압해 수많은 사상자를 낳았고, 전 세계적 비난을 받았다. 올해 초에는 아들과 거액의 비자금을 은닉하는 방법에 대해 상의하는 도청 내용이 폭로돼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심지어 이 스캔들이 불거지자 에르도안은 국민들의 트위터 접속을 차단했다가 헌법재판소의 제지를 받기까지 했다. 대선을 앞두고는 300여명이 사망한 광산 폭발사고 수습이 미흡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선거 기간에는 관권선거 논란까지 불거졌다.

이런 일들이 연달아 벌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에르도안의 지지율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그가 굳건한 지지율을 유지하는 것은 터키 경제를 성장시킨 공로 때문이다. 그는 2003년 취임 당시 3030억 달러였던 터키 국내총생산(GDP)을 10년 만에 8217억 달러로 두 배 넘게 끌어올렸다. 에르도안 재임 기간 중 터키는 세계 17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에르도안의 승리가 그의 말대로 ‘민주주의의 승리’라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오히려 이번 선거로 인해 2003년부터 12년 동안 총리직에 있었던 에르도안이 장기집권으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젖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지금까지 총리를 세 번 연임한 에르도안은 정의개발당 당내 규정상 4연임이 불가능하자 방향을 바꿔 대선에 출마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 때문에 에르도안은 흔히 ‘터키의 푸틴’으로 불린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08년 대통령 3연임 금지조항에 가로막히자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를 대선에 출마시키고 자신이 총리직에 올랐다가 2012년 다시 대통령에 출마해 직을 맞바꿨다.

정의개발당은 2007년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바꿨다. 대통령 임기도 7년 단임에서 5년 연임으로 바꿨다. 이에 따라 만약 에르도안이 다음 대선에서 연임에 성공하면 2024년까지 무려 22년간 정권을 잡게 된다.

문제는 터키가 내각책임제 국가로, 대통령은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데 있다. 그래서 에르도안은 내각책임제인 터키 정치체제를 대통령 중심제로 바꿔 계속 터키의 실권자로 군림하려는 ‘집권 연장의 꿈’을 꾸고 있다.

이번 터키 대선은 내각책임제인 터키의 정치체제를 대통령 중심제로 바꾸는 데 동의하느냐는 신임투표 성격이 강했다. 에르도안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헌법을 개정해 터키를 대통령 중심제 국가로 만들 것이라고 공언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수차례 “대통령이 헌법에 규정된 전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지난달 출마선언에서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헌법을 개정하겠다”고 공언했다.

터키 이슬람주의 가속화할 듯
오는 28일 취임하는 에르도안은 앞으로 개헌 절차를 착착 진행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개헌을 하려면 일단 에르도안이 이끄는 정의개발당이 내년 5월 예정된 총선에서 압승을 거둬야 한다. 터키에서 개헌에 필요한 의석수는 재적의원 3분의 2에 해당하는 367석이다. 현재 정의개발당은 313석을 차지하고 있다. 54석을 추가하면 집권당 단독으로 개헌을 할 수 있다. 에르도안은 당선 직후인 14일 정의개발당 지역지도자회의 연설에서 “개헌을 위해서는 내년 총선에서 최소 과반 이상을 획득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터키 언론들은 정의개발당이 기세를 몰아 올해 안에 조기 총선을 실시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정의개발당과 에르도안이 대통령 중심제 개헌을 하는 데 실패하더라도 에르도안이 ‘상징적 정부 수반’에만 머무르려 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에르도안은 의회를 소집하거나 내각 회의를 주재하는 등 사문화된 대통령의 권한을 모두 행사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게다가 그는 직접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이기 때문에 정치적 기반도 전임 대통령들과 다르게 탄탄하다.

에르도안의 장기집권 길이 열린 터키는 지금보다 더욱 종교적 색채가 강한 국가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 터키 국민의 98%는 공식적으로 무슬림이지만, 터키는 이슬람 국가가 아니다. 1923년 아타튀르크가 정교분리를 선언하고 세속주의를 국가이념으로 삼은 후 터키는 이슬람 민주주의의 모델로 성장했다. 하지만 에르도안 집권 후 터키 시계는 거꾸로 돌아갔다. 에르도안은 공공장소 헤자브 착용 금지 폐지, 주류 판매 제한 등 이슬람주의에 입각한 정책을 추진해왔다. 지난해 이스탄불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사태 역시 세속주의를 요구하는 시민들과 이슬람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정부의 갈등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분석이 많다. 에르도안 자신 역시 열렬한 이슬람교도다. 그는 공공연하게 “나는 수니파다”라고 자처하고 있다.

에르도안은 대통령 취임 후 더 강력한 이슬람주의 정책을 밀어붙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에르도안과 정의개발당을 견제할 세력도 마땅치 않다. 야당은 힘이 없고, 터키에서 세속주의의 수호자 역할을 해온 군부마저 에르도안에 의해 힘을 잃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에르도안이 중동 정세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그는 최근 이집트에서 무슬림형제단을 몰아내고 집권한 압델 파타 엘시시 대통령을 “폭군”이라고 비난했다가 이집트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히틀러와 다름없다”고 말해 인종주의자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터키 일간 휴리에트는 “에르도안의 강력한 이슬람주의적 배경 때문에 터키가 전통적 맹방이었던 서구세계와 등을 돌릴 위험이 있다”고 전했다.

<남지원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somni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