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로부터 온 편지]고중세에 존재했던 공존의 생활사

조선과 일본, 오키나와의 관계를 일반적으로 유추해 보면, 조선의 남부와 일본의 규슈 지역, 그리고 오키나와 본도 사이에는 강한 문화적 ‘친족성’이 존재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오키나와에 역사시대가 열린 것은 12세기 후반이다. 긴 구석기 시대와 패총 시대라는 완만한 시간의 미풍 속에서 진행되던 삶의 리듬이 12세기를 통과하면서 철기와 벼농사, 구스쿠(城)와 우타키(御嶽·종교적 성소)의 구축, 지역 아지(유력자)의 등장과 무력 항쟁을 동반한 초기 국가로 이행하는 역사적 흐름은 숨 가쁘다.

오키나와가 역사 시대로 들어가던 시점의 한반도는 무신란에 이은 항몽전쟁이 전개되던 시점이었고, 일본은 헤이안 시대에서 가마쿠라 막부로 이행하던 시점이었다. 중국은 남송의 힘이 쇠락해지는 반면 몽골족인 원나라의 무력이 동아시아 전반으로 확장되던 시점이었다. 한마디로 동아시아의 격동기였다.

‘정치성’이 개입되는 인문학적 탐색
바로 이 역사적 격동기에 류큐 열도에 속하는 오키나와 본섬에 오키나와 말로 ‘구스쿠’ 시대가 열렸고, 각 지역의 유력자들이 무장항쟁을 통해 힙을 결집한 오키나와 판 3국시대가 열렸으며, 이것이 이후 ‘류큐왕국’(1429)의 성립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12세기에 이르러 철기문명과 농업혁명을 가능케 하고 국가의 형성을 촉진한 이 갑작스런 문명의 파도는 어디서 온 것인가. 일본의 사학자나 오키나와 학자 모두 이것이 ‘외부’로부터 온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것의 논거로 제기되는 것은 고고학 발굴을 통해 확보된 각종 유물들과 현재도 남아 있는 각 지역의 구스쿠들이다.

12세기 무렵부터 류큐 열도에 외부 문화가 활발히 전래되는 구스쿠 시대를 거쳐 류큐왕국이 세워졌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석조 형태 건축물인 다마우둔은 류큐왕국 역대 국왕들의 능묘이다. | 위키백과

그렇다면 그 ‘외부’는 어디인가? 북쪽의 아마미 대도와 오키나와 본도는 한국·중국·일본의 문화적 영향이 강력하게 나타나지만, 오키나와인들이 사키시마(先島)라고 부르는 미야코와 야에야마 제도에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와 같은 남방문화의 흔적이 잘 나타난다.

고고학자들이 유물을 통해 선사시대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기원을 더듬어보는 반면, 넓은 범주의 인문학자들(문화인류학·민속학·언어학 등)은 오키나와인들의 생활양식, 언어, 기록과 설화(신화·전설·민담)에 대한 해석과 비교를 통해서 오키나와 문화의 총체성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 인문학적 탐색에도 명백한 ‘정치성’이 개입하게 마련이며, 특히 그것이 민족적 ‘기원서사’와 결합하게 되면 여러 형태의 의도된 오인을 낳을 수 있음도 분명하다. 가령 2차대전의 패전국인 일본이 연합군 당국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선포한 직후 출간된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國男)의 <해상의 길>은 류큐열도를 일본 민족의 기원 또는 시원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한다.

평범한 사람들(常人)과 민속문화에 대한 강렬한 정열을 보여주었던 이 노학자가 왜 이 시점에서 이 책을 발간한 것일까.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2) 발효를 기점으로 오키나와가 더 이상 일본의 시정권이 미치지 않는 미국의 ‘점령지’로 전락한 것에 대한 위기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거꾸로 이런 위기의식이 야나기타로 하여금 오키나와와 일본의 일체성, 동조동근(同祖同根)성, 일본 민족 기원설이라는 과감한 주장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것은 오키나와 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령 오늘날 일본과 오키나와 모두에서 ‘오키나와학’의 아버지로 간주되는 이하 후유(伊波普猷)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하 후유는 일본에 의한 오키나와의 강제 병합 이후 오키나와인 차별을 온몸으로 경험했던 청년이었다.

이 청년이 일본의 도쿄대학에 진학하고 거기서 국어학을 전공한 후 오키나와로 돌아왔을 때, 그의 마음속에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야심이 있었을 것이다.

‘오키나와 독자성’을 역설하는 이유
첫째, 일본인에 의한 오키나와인 차별의 무근거성을 학문적·이론적으로 내파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그 자신의 탁월한 어학능력을 활용하여 오키나와어가 고대 일본어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원석이라는 점을 역설한다.

야나기타 구니오나 오키나와 방언논쟁 당시 일본어 공영어론을 적극적으로 비판했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역시 이하 후유의 주장에 동의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하 후유는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에 깃든 독자성을 치열하게 역설하고자 했다. 오키나와에서 근대학문이 성립된 이래, 오키나와인 자신에 의해 오키나와의 독자적 정체성이 해명된 것은 이하 후유의 시도가 처음이었다.

그는 류큐왕부가 일본어 히라가나를 활용해 오키나와어로 채록한 신가집(神歌集) <오모로소시(おもろさうし)>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통해 역사 시대 이전의 오키나와의 전체상을 재구성하고자 애썼다.

식민주의자 일본인의 편견과 달리, 오키나와인들은 이미 높은 수준의 문화적 역량과 감수성을 갖고 있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일본에 의한 식민주의를 장기간 체험한 한국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오키나와 근대사에서 전개되었던 이 학술 부문의 보이지 않는 전선은 공감이 가는 바가 없지 않다.

식민지기 일본의 관변 조선학자들은 제국 일본에 의한 조선 병합의 논리적 근거를 이 언어·문화·민족의 동조동근성에서 찾았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백제나 가야 관련 기술을 확대 해석하고, 가공된 설화임에 분명한 ‘임나일본부’설을 사실로 확정하는 등의 방식을 통해 일본에 의한 조선 지배의 정당성과 자연성을 합리화했다.

그런데 이러한 일본의 관변적 조선학은 그 논리를 뒤집으면, 도래인(渡來人)에 의한 일본 민족 기원설이라든가 일본 열도 내의 ‘한반도 분국’(分國)설 같은 대항 논리에 의해 내파될 수도 있는 담론의 급소다.

이 각각의 지역에서 발굴되고 있는 토기나 기와를 포함한 유물, 지명의 특이성, 창세신화나 구전민담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설화소(說話素), 알타이어로 친족 언어라는 인접성, 모권적 샤머니즘 문화와 생사관 등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다.

그렇다면, 인문학자로서 이른바 ‘오키나와학’에 접근하는 가장 정당한 자세는 무엇일까. 내셔널리즘의 관점에서 고중세사를 소급 해석해서는 안 된다. 고중세의 평범한 민중들이 의식했을 ‘문화권’이나 ‘생활권’의 관점에서 있는 그대로의 교류사와 영향사를 인식하는 문화적 공존의식이 중요하다.

오키나와로부터 온 편지

일본이나 오키나와에서 우리는 놀랍게도 고중세 한반도 문화의 흔적과 조우할 수 있다. 이는 고중세에도 강력한 문화적 교통과 공존의 생활사가 존재했음을 우리에게 암시한다.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racan@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