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원의 에브리컬처]기타 수리를 위한 미국의 내쉬빌 여행

물론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기타 수리를 위한 내쉬빌 여행 같은 건 바보스러운 짓임에 틀림없다. 그 비용과 시간이라면 더 좋은 기타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회경제적으로 바보스럽기 짝이 없는 이 여행을 떠날 것이다.

사람들이야 어찌되든 ‘불필요한 경계금물’이니 ‘사회경제적 파장’이니 하는 암구어 웅얼거리며 복지부동 무사안일 자기계발에 여념 없던 각종 A, B, C, D들에 의해 또다시 갈 데까지 가버린 이번 메르스 사태가 우리의 일상에 입힌 갖가지 크고 작은 타격이야 새삼 말해 무엇하겠는가마는, 직장에 나간 동안 아이들을 맡길 곳이 마땅찮은 맞벌이 부부들의 분투 또한 상당히 눈물겹다. 나는 그나마 출퇴근이 따로 없는 직업의 소유자인지라 어느 정도의 응급대응은 가능했는데, 다른 맞벌이 부부 여러분들은 대체 어떻게 대응하고 계신지들. 이 지면을 빌려 위로 및 응원 말씀 드린다. 부디 힘내시길.

‘우리 집 난로 밑에 보물이 있었다’
아무튼 덕분에, 라고 해야 할지, 요즘 두 살짜리 딸 녀석에게 부쩍 더 많이 그림책을 읽어주게 되었는데, 가만 보니 그 책들 중에는 딸보다는 내가 좋아서 사들인 책들도 꽤 있었다(비율로 보면 대략 30% 정도). 이 일 이전에는 그 책들의 존재조차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들 대부분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딸로부터 차갑게 버림받았기 때문인데, 반대로 딸이 좋아하는 책들 중에 나로선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책들 또한 꽤 된다. 하지만 이 책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도저히 프로의 솜씨라고 보긴 어려운 조악한 그림체부터 “이게 뭐야!”라는 신음 절로 나오는 허탈한 결말까지, 도무지 왜 그런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달라고 하는 건지 물어봐봐야 “다시, 다시, 다시”라는 거역할 수 없는 요청만이 되돌아올 뿐인 그 신비의 책들….

하지만 용케도 나와 딸의 마음에 모두 드는 데 성공한 책들도 있는데(비율로 보면 대략 2~3% 정도), 그 중에는 유리 슐레비츠라는 작가의 1978년 작인 <보물(The Treasure)>도 있다.

동화책을 읽고 있는 여자 아이의 모습 | 레이디경향 자료사진

그 내용은 이렇다. 입에 풀칠도 제대로 못 하는 가난한 시골 노인이 어느 날 꿈에서 ‘왕궁 앞 다리 밑을 파면 보물이 있다’는 계시를 받는다. 하여 그는 산 넘고 물 건너는 오랜 여행 끝에 왕궁에 도착해 다리 밑을 파 보았지만, 보물은 없었다. 그때 그 남자를 줄곧 지켜보던 왕궁 경비대장이 다가와 “내 꿈엔 자네 집 난로 밑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말이 들리던데? 하하하”라며 놀린다.

이 말을 들은 노인은 또다시 고된 여행길 끝에 집으로 돌아와 난로 아래를 파 보았다. 그랬더니 그곳에는 정말로 보물이 있었다. 하여 그 남자는 평생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다는 것이, 다소 허무한 구석이 없지 않은 이 책의 내용인데, 짐작컨대 필시 이러한 허무함이 딸 녀석의 기묘한 취향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짐작해보는 가운데, 아무튼 그 동화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때론 가까이에 있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 멀리 여행해야 할 때가 있다.’

뭐, 이는 물론 동화책 특유의 도식적인 교훈 요약으로 보이긴 한다만, 요즘처럼 이 문장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때도 없다. 물론 메르스 사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최근 개인적으로 당한 불의의 사고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불의의 사고’라 함은 애지중지하던 기타(깁슨사의 ES-335라는 모델)의 목이 부러져버린 사고인데, 그 경위는 이렇다.

얼마 전 새로 이사를 하면서 아내의 준엄한 명령에 따라 ‘작업실’이라고 명명된 방에 내 ‘보물’들을 전부 몰아넣게 되었다. 이사 전까지는 집안 이곳저곳에 적당히 분산수용해 오고 있었는데, 공익을 외면한 나의 행태를 예의주시하던 아내가 이사와 동시에 칼을 뽑아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보물’이라고 칭한 물건들이란 4대의 기타(및 앰프들 및 페달들)와 자전거(및 자전거 트레이너 및 딸이 태어나면서 새로 사들인 유아용 트레일러), 각종 화구들(및 판넬들 및 캔버스와 오일들) 등등인데, 이들 ‘장비’들에겐 다들 부피가 만만찮을 뿐더러 상당히 ‘섬세하고도 까다로운’ 물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국내에선 수리 불가’ 암담한 현실
아시다시피 인간이든 물건이든 섬세하고도 까다로운 것들이 한 공간에서 탈 없이 공존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이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론적으로는 적어도 리틀야구장 정도의 면적쯤은 돼야 그럭저럭 상호충돌 없이 공존공생할 수 있는 위 물건들은 불행히도 주인을 잘못 만난 탓에, 꽤나 협소한 공간에서 부대껴야 하는 열악한 처지에 놓이게 되고, 그리하여 결국 비극은 벌어지고 만다.

이사 온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키우는 고양이들마저 모두 잠든 한밤중이었다. 나는 불도 켜지 않은 채(도대체 왜 그랬던 거야!) 뭔가를 꺼내러(그 물건이 뭐였는지는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이 지뢰밭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절대 넘어지지 않습니다’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기타 스탠드를 실로 신묘한 각도와 강도로 건드린다. 그렇게 넘어져버린 기타는 하필이면 그 건너편에서 싸늘한 금속광을 발하고 있던 자전거 트레이너의 철제 디스크에, 하필이면 가장 약하다는 목 부분을 정통으로 부딪히게 되는, 그야말로 <밀리언 달러 베이비>스러운 사고를 당하게 된다.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어둠을 찢던 그 경쾌하고도 단호한 나무 부러지는 소리, 그리고 그 뒤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금속 조각 같은 것이 나뒹굴던 소리를….

설상가상인 것은 이 기타가 오랜 친구로부터 선물받은, 결코 함부로 폐기처분할 수 없는 기타라는 점이었다. 따라서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원래 상태 그대로 수리를 하는 것뿐.

백방으로 알아본 결과 ‘국내에선 수리불가’라는 암담한 현실에 부딪힌 나는 결국 이 기타의 제조사인 미국 깁슨사에 문의를 하기에 이르는데, ‘한국의 고객들은 미국 테네시주 내쉬빌에 있는 수리센터로 직접 기타를 들고 오는 방법밖에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뭐라고!). 여기에 덤으로, 위로의 차원에서 ‘매년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망가진 기타를 들고 내쉬빌로 여행 온다. 그 중에는 기타의 원래 가격보다 더 비싼 수리비를 기꺼이 감수하는 경우도 흔하다’는 얘기도 함께 왔다(대체 이걸 위로라고 하는 거야!).

아무튼 그런 사연으로 결국 나의 가엾은 밀리언달러 베이비 기타는 현재 내쉬빌로의 부활여행을 떠날 그날만을 기다리며, 고이 케이스 속에 잠들어 있다.

물론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기타 수리를 위한 내쉬빌 여행 같은 건 바보스러운 짓임에 틀림없다. 그 비용과 시간이라면 더 좋은 기타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내쉬빌보다 훨씬 좋은 곳을 여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회경제적으로 바보스럽기 짝이 없는 이 여행을 떠날 것이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기필코. 덜렁 필름 한 장을 찾기 위해 그린란드-아이슬란드-아프가니스탄을 거쳐 히말라야까지 두루 섭렵하는 초장거리 여행을 마다하지 않았던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월터 미티처럼.

한동원의 에브리컬처

그리고 되찾을 것이다. ‘우리 집 난로 밑’ 보물을. 일상을.

<한동원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