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뛰는 놈 위에 나는 놈, 그 위에 컴퓨터

이제 네트워크에 연결된 개인용 컴퓨터는 방심하면 남들이 침투할 수 있는 ‘열린 컴퓨터’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가정용 컴퓨터뿐만 아니라 은행이나 관공서 등에 저장되어 있는 개인정보를 빼낼 수 있다면 문제는 아주 심각해진다.

누군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물건을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물건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쓰기 나름이다. 누군가 나쁜 생각을 품는다면 세상의 모든 일상용품조차 사람을 잡을 수 있는 위험한 물건으로 바뀔 수가 있다. 폭탄의 대명사처럼 쓰이는 다이너마이트까지도 광산이나 건설용으로 쓰이는 ‘안전한 폭발물’로 발명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긴 우산이나 손톱깎이 등이 비행기에 들고 탈 수 없는 위험물로 분류될 것이라고는 상상력이 뛰어난 소설가들조차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구형 아날로그 컴퓨터(1949년)

첨단 생활용품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자 노벨이 부작용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최초의 컴퓨터가 만들어졌을 때도 이것을 범죄에 쓰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선 초기에는 만들 수 있는 나라도 드물었다. 사용방법도 쉽지 않아 연구소 같은 장소 외에서는 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 1943년 IBM의 회장 토머스 왓슨이 ‘세계 시장의 컴퓨터 수요는 아마 다섯 대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도 당시에는 크게 놀라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세계에 다섯 대뿐이리라는 예측은 틀렸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옛 신문기사를 찾아보면 컴퓨터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서울은 교육 사상 처음으로 컴퓨터를 사용, 지원생이 추첨 장소에 나가지 않고 중학교가 배정…’(1970년 2월 3일 경향신문), ‘71년의 과학행정 컴퓨터 화’(1971년 1월 4일 경향신문) 등을 보면 컴퓨터를 마치 첨단기술의 상징 같은 존재처럼 표현하고 있다.

미요시 도루 <컴퓨터의 몸값> 표지.

범죄의 도구가 될 거라고 상상했을까
초기에 나타난 컴퓨터에 관련된 범죄는 이 ‘귀하신 몸’과 같은 존재에 대한 위협이었다. 이는 미요시 토루의 <컴퓨터의 몸값>(1980)에서 잘 묘사된다. 이 작품에서 지능적 범죄자는 은행에 침입해 컴퓨터를 인질(?)로 잡고 10억 엔을 주지 않으면 모두 폭파해버리겠다는 협박을 한다. 인질이 된 컴퓨터의 가격은 500억 엔, 월 1억1500만 엔에 임대해 사용하는 고가의 물품으로, 10억 엔이라는 몸값이 수긍이 간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의 해설에 나온 컴퓨터 범죄의 유형이다. 여기서는 네 가지로 구분해 소개하고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①컴퓨터를 공격대상으로 하는 범죄 ②은행 컴퓨터를 악용한 사기 범죄 ③범죄계획을 짜는 데 컴퓨터 이용 ④컴퓨터 미숙련자를 대상으로 한 사기 범죄 등이다. 21세기의 컴퓨터 범죄와는 제법 거리가 느껴진다.(③의 경우, 요즘은 컴퓨터 범죄로 간주할지 의문이다)

컴퓨터 시대의 획기적 변환을 가져온 계기는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과 인터넷의 확산이다. 1970년대 말 미국의 대형 컴퓨터 업체 창업자가 ‘집집마다 개인용 컴퓨터가 필요한 이유는 전혀 없다’고 말했지만 그의 통찰은 틀렸다. 요즘은 말 그대로 개인 한 사람마다 컴퓨터 한 대 있는 집이 드물지 않다. 또 이와 함께 인터넷 확산을 통해 누구나 엄청난 양의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스웨덴 영화 <밀레니엄> 시리즈의 ‘해커’ 리스베트 살라데르(누미 라파스 분).

이러한 발전은 컴퓨터 범죄의 범위도 분명히 넓게 만들었다. 이제 네트워크에 연결된 개인용 컴퓨터는 ‘나 혼자만 쓰는 것’이 아니라,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남들이 침투할 수 있는 ‘열린 컴퓨터’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가정용 컴퓨터뿐만 아니라 은행이나 관공서 등에 저장되어 있는 개인정보를 빼낼 수 있다면 문제는 아주 심각해진다.

마이클 코넬리의 <허수아비>(2009)에서는 그러한 능력을 가진 악당이 등장한다. 그는 어떤 사람의 신용카드와 휴대전화를 정지시킬 수 있고, 이메일을 가로챌 수 있으며, 심지어는 살인까지 저지른 뒤 타인에게 누명을 씌울 수도 있다. 같은 해 출간된 제프리 디버의 <브로큰 윈도>(2009)에서는 미국 최대 데이터베이스 회사(전화번호·주소·자동차면허 등 기본 신상정보를 비롯해 물품 구매내역, 여행 정보, 신용정보와 수입내역, 고용내역, 가족·친지·동료관계, 웹상의 인맥관계까지 한 인간의 모든 정보가 들어 있는 곳)의 정보망을 연쇄살인마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설정에서 시작되고 있다.

<브로큰 위도>의 저자 제프리 디버.

소설 속 상상이 현실이 되는 세상
반면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에 등장한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이러한 능력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용한다. 리스베트는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도덕관념을 가졌고, 외모(거식증 환자처럼 마르고 얼굴 여러 곳에 피어싱을 하고 있다)로는 짐작조차 못할 정도의 뛰어난 능력을 가진 해커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 못하는 일이 없다. 정부도 건드리기 힘들어하는 성매매집단, 공권력을 가진 사악한 집단의 빈틈을 신기에 가까운 해킹 능력으로 파고들어가 약점을 파헤쳐 파트너(?)인 저널리스트 미카엘 블롬크비스트의 활동을 도와준다.

언젠가는 컴퓨터가 자체 지능을 가지게 되어 사람을 공격할 수도 있으리라는 상상도 할 수 있고, 또한 그런 내용을 다룬 영화나 소설도 드물지 않다. 단기간 내에 그런 일이 벌어질 것 같진 않다. 하지만 예상이라는 것은 어떤 천재에 의해서 쉽게 뒤집어지는 경우도 수두룩하니, 쉽게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스마트폰은커녕 휴대전화기조차 개인이 가지고 다닐 수 있었을까 상상도 못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제프리 디버의 컴퓨터 범죄를 다룬 또 다른 작품 <블루 노웨어>(2001)의 후기에 동감할 수밖에 없다.

‘내가 이야기를 나눠 본 몇몇 컴퓨터 전문가들은 지금으로서는 ‘트랩도어’와 같은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것이 십중팔구 불가능할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나로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안재권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

더 큰 문제는 현실에서도 소설과 흡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숱하게 보도되는 보이스피싱 등의 사기 범죄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원전 가동 중단과 함께 100억 달러의 돈을 요구하는 협박성 글을 올린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해킹 사건이 발생했다. 아쉽게도 현실에는 소설 주인공과 같은 활약을 보이는 사람이 없었는지 사건은 미궁에 빠져 있다. 각자가 정신을 바짝 차리는 수밖에 없겠다.

<박광규 추리소설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