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본 세상]<진주>-애처러운 20대의 고단한 로맨스

<진주>는 판타지라는 화려하고 커다란 박스를 걷어냈다. 박스 안에는 로맨스라는 포장지로 싸인 20대의 고단한 삶이 있다. 연애가 고단한 일상 위에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 이 만화는 신데렐라 판타지를 지우고 현실을 불러낸다.

청춘의 사랑은 쉽게 금이 가고, 낙엽처럼 순간에 지기도 하고, 진눈깨비처럼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기도 한다. 청춘의 사랑은 만나지 못한 이들에게는 동경으로, 통과하는 도중에 있는 이들에게는 희열이나 아픔으로, 그 시절을 돌아보는 이들에게는 회한과 그리움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청춘의 사랑은 누구나 들어보고 싶은, 보고 싶은 이야기다.

이노안 작가의 <진주>는 올레마켓웹툰에 연재 중인 만화다. 2013년 11월 28일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으로, 2015년 2월 17일 예순네 번째 이야기까지 연재되었다. <진주>는 20대 청춘의 사랑 이야기다. 연인 앞에 새로운 그/그녀가 나타난다. 작가는 능숙하게 독자들이 감정을 이입하는 대상과 그 상대방의 감정을 조절한다. 그렇게 연애 이야기 특유의 밀고 당김이 작가와 독자의 밀고 당김으로 연결된다. 이 밀고 당김은 달달한 사탕처럼 입 안에 굴러 다닌다. 달콤함은 입 안 가득 퍼진다. 기분 나쁘지 않다.

이노안 작가의 만화<진주> | 올레마켓웹툰

아침부터 저녁까지 알바의 피곤한 일상
그런데 문득 독자들은 이 달달한 연애 이야기가 올라서 있는 곳이 멋진 중세풍 고성도 아니고, 이국의 낯선 정취도 아님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주인공 진주가 서 있는 자리가 고단한 노동의 자리임을 확인하는 순간 시작된다. 만화가 시작되면서부터 진주는 단 한순간도 쉬지 않는다. 낮에는 카페의 알바로, 저녁에는 편의점 알바로 일한다. 기껏해야 일주일에 하루를 쉬는데 그때는 데이트를 해야 한다. 연애가 사실 당연하지만 고단한 일상 위에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 이 만화는 신데렐라 판타지를 지우고 현실을 불러낸다.

<진주>가 현실에서 연애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 만화 스타일도 판타지한 순정(여성)만화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탐미적이며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섬세한 선과 과장된 캐릭터, 복잡한 연출 효과들을 보여주던 순정(여성)만화의 스타일과 비교해 선은 간략해지고, 신체 비율은 더 현실적으로 정리되었다. 무엇보다 연출에서 칸을 겹치거나 과한 배경을 활용하지 않고 담담하게, 마치 일상을 투명하게 잡아낸 듯 앵글을 구성한다. 여기에 더해 <진주>는 배경, 소품, 인물의 옷 등을 최대한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이야기 전개에 중요한 요소로도 활용되는 편의점에서 진주의 집까지 가는 길, 특히 마의 언덕길은 내가 그곳에 서 있는 듯 섬세하다. 일상의 고단함을 담아낸 카페의 좁은 휴게실, 편의점의 카운터, 진주네 집 등을 보면 작가가 공간에서 현실성을 최대한 담아내려 한 것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런데 독자들은 <진주>가 보여주는 연애와 공존하는 현실이 낯설다. 그러다 보니 다른 연애만화와는 독자의 반응이 다르다. 이야기는 여자 주인공 진주의 시점에서 진행되지만, 그래도 시선이 공평하게 배분된다면 남자 주인공 정민에게도 감정을 나눠줄 독자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독자들은 일방적으로 진주를 응원한다. 정민이 학교에 2학년으로 복학하고 군대에 가기 전 정민을 좋아했던 후배 은지를 만난다.(연애가 아니다!) 정민의 친구 페이스북에 공유되는 사진을 보고 진주는 ‘은지’의 존재를 깨닫는다. 이 순간, 모든 댓글은 정민을 타박한다. 정민이 진주와 은지 둘을 모두 관리한 것도 아니다. 단지 정민을 잊지 못하는 은지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독자들도 그 형편을 모르지 않지만, 정민에게 분노한다. 이 일방적인 분노는 고단한 현실을 살아가는 진주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입 때문이다. 이건 진주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노안 작가의 만화<진주> | 올레마켓웹툰

주인공의 이야기이자 우리의 이야기
하루에 아르바이트 2개를 하는 24세의 청춘. 중학교 시절 피아노를 전공해 예고를 가려고 했고, 친구들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즐겨 했지만 가정사정 때문에 대학에 가지 못한다. 무능한 (것처럼 보이는) 아버지는 늘 사업에 망하고, 아들만 위하는 어머니는 매일 전화를 해 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연히 카페에서 만난 고등학교 시절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광고회사에 다닌다고 한다. 그나마 위로를 받던 남자친구는 학교에 복학해 어린 여자 후배들과 어울린다. 사랑은 지켜봐주는 거라지만, 하루하루 고단한 노동에 지쳐 잠이 들면 다시 출근을 해야 하는 진주에게는 절대 대범하게 넘길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숨막히는 삶의 터널을 달달한 연애로 포장하지만, 우리 모두에게 미안하게도 현실의 강한 빛을 포장지가 가리지 못한다. 포장지는 투명하게 현실을 비추기만 한다.

대중매체에서 다루는 달달한, 때로는 칼날 같은 연애는 대개 판타지로 포장되어 있다. 현실과의 연결고리는 미약하고, 대신 그 자리에 외제차를 탄 실장님이 있을 뿐. 현실에서라면 실장님을 만나기도 힘든 여직원이지만, 판타지에서는 그 실장님이 모든 걸 거는 존재가 된다. 각박한 현실을 사는 우리들에게 (판타지) 로맨스는 현실의 고단함을 녹이는 작용을 한다.

하지만 <진주>는 판타지라는 화려하고 커다란 박스를 걷어냈다. 박스 안에는 로맨스라는 포장지로 싸인 20대의 고단한 삶이 있다. 게다가 포장지인 로맨스는 투명하다. 주인공 진주는 마치 서울로 돈 벌러 올라온 70년대의 누이들 같다. 피아노를 배웠지만, 집안의 사업이 망하고,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하루 종일 아르바이트에 매달린다. 그렇게 번 돈을 매달 집으로 송금한다. 그리고 대학에 다니는 동생과 함께 산다. 하나의 위안은 그래도 대학을 다니는 남동생 진환이 누나의 고단함을 이해하고 함께 나누려 한다는 점.

만화로 본 세상

만약 동생마저 누나의 노동을 착취했다면, <진주>는 헤어나올 수 없는 고단함의 수렁에 빠졌을 터이다. 진주는 낮에는 ‘투더씨’라는 카페에서, 밤에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식사는 늘 편의점에서 가져온 유통기간이 지난 삼각김밥이나 샌드위치다. 휴게실에서 삼각김밥을 먹다 쓰러지듯 잠을 잔다. 진주가 누리는 호사는 야간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라면을 끓여 먹거나 스마트폰으로 TV를 보는 것뿐이다. 진주는 너무 피곤해 연애를 하다 길에서 잠이 들기도 한다. 거짓말인 듯 보이지만, 미안하게도 이 고단함은 많은 이들에게 현실이다. 놀라운 건, 이 고단한 일상을 사는 우리를 “덜 벌어도 덜 일하니까 행복하다는 그들”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달관세대라는 신조어를 붙여, 월 100만원만 벌어도 행복하다고 한다. 그런 이들에게 고단한 현실을 사는 연인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다.

<박인하 만화평론가·청강문화산업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