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추리소설의 고민 “CCTV를 어찌할꼬”

신속한 해결이 필요한 현실 수사와는 달리 추리소설에서는 수사관과 미지의 범죄자 사이에 벌어지는 두뇌싸움으로 긴장감을 조성한다. 그런데 마침 범행 시간에 녹화된 영상이 있어 범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드러난다면 너무 싱거워지고 만다.

새해 들어 뉴스에서 공개된 동영상 하나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다름 아닌 어린이집 폭행사건의 동영상. 수십 초에 불과한 짧은 순간을 보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물론 극소수 어린이집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라고 믿고 싶지만, 다른 곳에서도 폭행 사례가 당국에 의해 드러나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만약 CCTV(폐쇄회로 텔레비전)가 없었다면 이 사건이 밝혀졌을까? 1등공신이라는 표현은 좀 어색하지만, 이제 CCTV는 현대 사회에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됐다.

꽤 오래전에 제작된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1998)에서는 정부기관이 인공위성이나 CCTV를 통해 주인공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극장에서 볼 때만 해도 미국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차츰 CCTV가 늘어나면서 이제는 한국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현실이 되고 말았다.

CCTV.

CCTV 때문에 알리바이 트릭도 줄어
CCTV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설치 초기만 해도 범죄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찬성 의견과 사생활 침해라는 반대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러나 요즘은 어린이집 폭행사건을 비롯하여 적지 않은 수의 강력범죄가 CCTV에 녹화된 영상에 의해 해결되면서 긍정적인 면이 부각되고 있다.(물론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어느 큰 세력에 의한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과거에는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에 이르는 비싼 가격이 걸림돌이었지만, 요즘은 성능도 좋아졌고 가격도 저렴해져서 누구나 쉽게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대문 인터폰에서부터 시작해 승용차에 달린 블랙박스가 있다. 시내버스와 지하철 역, 편의점과 식당 천장에 달려 있으며, 허름한 골목에도 ‘CCTV 녹화 중. 쓰레기 버리지 마시오’라는 경고가 보인다. 외출해서도 스마트폰을 통해 집에 누가 다녀갔나를 확인할 수도 있다. 외딴 산속에라도 들어가지 않는 이상 현대인의 일상생활은 거의 어딘가의 저장 매체에 녹화되고 있다. 범죄로 먹고 살아갈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시대가 된 셈이다.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지만, 소설 속에서 ‘완전에 가까운 범죄를 구상하는 것’이 직업인 한국의 추리소설가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CCTV 때문에 적지 않은 고민을 하고 있다.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DVD 커버).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범죄를 저지르는 동안, 이동 과정이 남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는 설정이라고 하자. 그런 장거리를 도보로 이동할 수는 없으니 승용차나 대중교통을 이용해야만 하는데, 도로 곳곳에 설치된 CCTV에 녹화되지 않을 방법이 없다. 모든 곳의 기계를 고장낸다거나, 수사관이 실수로 화면을 보지 않고 지나친다는 비현실적 해결책은 당연히 쓸 수 없다. 혹시 누군가가 먼저 기발한 아이디어를 발휘했다면 작가의 자존심상 같은 방법을 쓸 수는 없고, 그것을 능가하는 아이디어를 짜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야만 한다.

또 경찰의 수사 장면을 묘사할 때도 마찬가지. 신속한 해결이 필요한 현실 수사와는 달리 추리소설에서는 수사관과 미지의 범죄자 사이에 벌어지는 두뇌싸움으로 긴장감을 조성한다. 그런데 마침 범행 시간에 녹화된 영상이 있어 범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드러난다면 너무 싱거워지고 만다. 요즘 추리소설에 알리바이(현장부재증명) 트릭이 별로 나오지 않는 것도 이런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CCTV 같은 것은 좀 예외이지만, 첨단과학은 추리소설가들에게 영감을 가져다주고 있다. 지문이 대표적인 예이다. 의사 출신인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 시리즈를 발표하던 19세기 말에는 지문이 범죄의 중요한 증거로 막 인식되던 시기였다. 도일은 일찌감치 <네 사람의 서명>(1890), <입술이 뒤틀린 남자>(1891) 등에서 지문에 관련된 언급을 한다. 이는 런던 경찰국이 1901년 지문 체계를 채택한 시기보다 앞선다. <노우드의 건축업자>(1903)에서는 좀 더 적극적인 묘사가 나온다.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현장에 남은 엄지손가락 지문과 용의자의 지문이 동일하기 때문에 범인이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노우드 건축업자>(그림 레드릭 도어 스틸).

휴대전화 등장으로 ‘외딴곳’ 사라져
몇 년 후 영국 작가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역시 의사 출신이다)은 <붉은 엄지손가락 지문>(1907)을 발표했다. 지문을 중요한 증거로 다룬 이 작품을 통해 주인공 존 손다이크 박사는 추리소설 속 ‘과학수사’의 원조가 되었다. 그는 범죄수사를 위해 온갖 설비를 갖춘 개인 연구실을 가지고 있으며, 밖으로 나갈 일이 있으면 ‘휴대용 실험실’이라고 불리는 녹색 가방을 항상 들고 다닌다. 그 가방 안에는 각종 약품과 소형 현미경을 비롯해 자신의 연구실을 축소해 놓은 듯한 갖가지 실험장비가 들어 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추리소설가는 첨단 과학기술을 십분 활용한다. 제프리 디버가 창조한 링컨 라임은 뉴욕 시경의 과학수사본부장 출신으로 범죄 현장에서 사고로 척추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어 어깨 위 머리와 손가락을 제외한 모든 곳이 마비된 환자이다. 그는 뉴욕 시경 특별고문으로서 수사에 참여한다. 침대에 꼼짝 않고 누운 채 조수와 동료를 시켜 첨단 분석기기와 장비로 자료를 분석하여 최종 결론을 내린다. 미세 먼지의 분석만으로 그것이 뉴욕의 어느 지역에서 날아온 것인지 알아낼 정도이다.

대중화된 첨단기기 중 휴대전화는 추리소설에서 필수 소도구가 되었다. 1984년 이동전화가 도입될 때만 해도 부유층이나 특수 용도로만 쓸 수 있는 고가품이었으나 30년이 흐른 지금은 휴대전화가 없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일반화되었다. 또 도입 초기와는 달리 기지국도 곳곳에 있어 웬만한 곳이라면 통화가 가능하다. 특히 왕년의 컴퓨터보다도 성능이 좋아진 스마트폰 보급률이 80%에 달한다고 하니, 첨단기술의 완벽한 대중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

그러다 보니 가끔 웃기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21세기 한국을 배경으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1939)나 아야츠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1987)과 같은 작품-외딴곳에 사람을 모아놓고 누군가가 며칠에 걸쳐 연쇄살인을 벌이는 이야기-을 재구성한다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요즘은 둘이 마주 앉아서도 얼굴 대신 스마트폰을 보는 시대. 10명쯤 어딘가에 모아 놓았을 때 범죄가 벌어지기라도 하면 누군가 휴대전화로 경찰에 구원 요청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범죄현장 사진을 찍어 SNS나 블로그에 실시간으로 업로드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제3자인 인터넷 이용자가 범인의 신상 털기에 나서고…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외딴 곳’이라는 의미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어쩌면 추리소설이 아니라 유머소설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추리소설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