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스크린]‘10분’ - 공기업 인턴이 넘을 수 없는 벽

포스터 = ㈜ 타이거 시네마

제목 10분

영제 10 Minutes

감독 이용승

출연 백종환Ι강호찬, 김종구Ι부장, 정희태Ι노조지부장, 이시원Ι송은혜

상영시간 93분

등급 12세 관람가

“복지안동이라는 말을 아나요?” 한 교수가 반문했다. 땅에 납작 엎드려 꼼짝 안 한다는 복지부동(伏地不動)은 아는데 안동이라니. 안은 눈 안(眼)이었다. ‘납작 엎드려 눈알만 굴리며 여기저기 눈치를 본다’는 뜻이라고 했다. ‘트렌치 이코노미’라는 주제로 기획을 할 때였다. 2008년 또다시 외환위기가 오니 마니 할 때 들은 신조어다.

영화 <10분>의 마지막 장면이자 절정부에서 떠오른 말이다. 보도자료를 받아봤을 땐 여기서 10분이 출근시간 커트라인을 말하는 건가라고 생각했다. ‘출근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라는 소개글을 봤을 때 떠오르는 건 보다 코믹한 것이었다. 그게 아니었다. 10분은 주인공 호찬에게 주어진 생각해볼 시간이다. “이번에는 확실하니 정규직으로 취직할래, 아니면 그만둘래”라는 부장의 제안에 답을 줘야 한다.

그 10분 동안 회의실 안에 앉아 있는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이렌이 울리고 지진 대비훈련을 하는 사무실 구성원들의 모습이다. 그 사람들은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간다. 옷이 구겨지고 내의가 나온다. 이런 훈련을 했다고 남길 자료사진을 찍은 뒤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 일어선다. 이 과정은 슬로모션으로 호찬의 눈에 각인된다. 호찬은 그 10분 뒤 부장에게 어떤 답을 했을까.

방송국 PD 시험을 준비하는 호찬은 한 공기업의 6개월 인턴으로 들어간다. 이 공기업은 지방 이전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가 들어간 팀은 지방이전 준비팀. 정규직 신입 초봉이 3500만원이니 나쁜 직장은 아니다. 그렇다고 구성원들로선 딱히 좋은 직장도 아니다. 지방까지 따라갈 결심을 하는 사람은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는 거의 없다. 고만고만하게 적당히 서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산다. 사무실에서 얼굴을 맞대고 살지만 그들과 호찬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부장의 정규직 제안은 호찬에게 희망고문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내정되어 있던 자리를 원장의 ‘빽’을 등에 업고 들어온 젊은 처자가 낚아채 간다.

방송국 PD 시험을 포기하자 화들짝 깨닫는 것은 현실이다. 노조위원장은 호찬의 일을 신경써주는 듯 싶지만, 젊은 처자는 뜻밖에 적응을 잘한다. 아무 문제가 없는 한 시스템은 다시 그냥 굴러간다. 호찬의 절박함은 고립되었다. 건성건성 일하던 다른 인턴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부모를 잘 둔 덕분이다. 한심해 보였던 그치보다 자신의 처지가 일순간 더 한심해졌다. 호찬의 눈엔 그 공기업을 넘어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하다. 어느날 문득 깨닫게 되는 한국 사회가 돌아가는 원리란 노력과 진정이 보상되지 않는 시스템이다.

터치스크린

몇 년 전 ‘유리천장’이라는 말이 회자된 적 있다. 승진에서 여성차별을 지적하기 위해 나온 개념이다. 영화에서 중요한 알레고리 역할을 하는 것은 사무실과 회의실을 나누는 유리벽이다. 유리벽 너머 회의실에서 직원들이 케이크를 먹으며 농담 따먹는 모습이 사무실에서 복사 심부름을 하고 있는 호찬의 눈에 비친다. 마지막 장면에는 반대로 그 유리벽 너머의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풍경이 우스꽝스럽지만 씁쓸하게 묘사되고 있다. 투명하지만 쉽게 넘을 수 없는 벽.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일상의 정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이렇게 명징하게 포착한 영화가 있었나 돌이켜 보면 기억나는 작품이 없다. 감독의 대학원 졸업 작품이지만 지난해부터 전 세계 국제영화제 상을 휩쓸고 있는 영화다. 감독이 한 문화 관련 대기업에서 실제 인턴으로 활동한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 <한공주>에 이어 또 하나 한국독립영화의 수작을 만난 것 같다. 추천하고 싶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