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기행]퇴계와 남명… 안동과 산청

매화나무 두 그루

신천재에서 바라본 지리산의 웅자.

경상좌도에 퇴계가 있다면 경상우도에는 남명이 있다. 퇴계 이황(1501~1570)과 남명 조식(1501~1571). 두 동갑내기는 영남학맥, 아니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양대 거목이었다. 하지만 퇴계가 동방의 성현으로 추앙받고 있는 데 비한다면 남명이 받고 있는 대접은 초라하기까지 하다. 그리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남명이 퇴계와는 달리 벼슬을 일절 사양하고 지리산에 은둔하여 학문에만 전념했던 게 가장 큰 까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개마저 그러한 것은 아니어서, 선비로서 꼿꼿한 골기만은 남명이 윗길에 선다.

두 사람은 평생 한 번도 만나지 못했으나, 서로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했다. 한때 퇴계는 남명에게 벼슬길에 나설 것을 권고하기도 했으나, 남명은 이를 물리쳤다. 그래서 퇴계가 한 해 먼저 세상을 뜨고 난 후 남명은 “같은 해에 같은 도에 태어났으면서도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이 운명이로다” 하며 애석해하면서도, 퇴계가 “내 명정에는 처사라고만 쓰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말을 듣고는 “할 벼슬을 모두 다하고도 처사라니, 진정한 처사야말로 나”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두 사람은 그 인품의 고결함과 학문의 깊이로는 선후를 가리기가 어려울 정도였는데, 한 가지 커다란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남다른 ‘매화 사랑’이었다. 퇴계가 숨을 거두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저 매화나무에 물 줘라”였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을 만큼 퇴계의 매화 사랑은 매우 각별했다. 남명 역시 이에 못지않아서 지리산 자락에 산천재를 짓고 살면서 매화 한 그루를 심고 천왕봉을 바라보며 말년을 보냈으니, 그가 심은 매화나무를 후인들은 ‘남명매’라고 부른다. 사군자의 필두이면서 고결한 선비정신을 상징하는 매화야말로 두 사람의 학문과 삶을 그대로 나타내는 상징인 셈이다.

퇴계의 자취를 따라가는 일은 안동 도산서원 일대에서 청량산으로 이르는 길을 따라가는 일이기도 하다.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한 도산면 일대에는 퇴계의 생애가 고스란히 스며 있다. 온혜리의 퇴계태실을 비롯해 토계리 상계동의 퇴계종택, 하계동의 퇴계묘소 등이 2~3㎞ 거리 안에 모두 모여 있다. 도산서원이야 새삼 이를 필요조차 없고, 그가 사색하며 걸었다던 ‘퇴계 예던(가던) 길’을 따라가보자. 도산면 낙동강 가에 있는 ‘퇴계 예던 길’은 도산서원에서 청량산을 오가던 옛길로, 단천리에서 가송리 농암 이현보 종택까지 이어지는 3㎞가량의 오솔길이다. 퇴계는 이 길을 따라 거닐면서 시심을 키우고 사색을 즐겼다.

고인도 날 못 뵈고 나도 고인 못 뵈/고인을 못 뵈어도 예던 길 앞에 있네/예던 길 앞에 있거니 아니 예고 어이리
- 이황 ‘도산십이곡’ 중 제9곡

낙동강 물빛과 청량산 산빛이 소슬한 ‘퇴계 예던 길’.

그로부터 400년 후에는 또 다른 정신 하나가 그 길을 따라가니 바로 이육사다. 저항시인 이육사는 퇴계의 14대 손이기도 하니, 그 정신의 뿌리가 어떠함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퇴계 예던 길’로 넘어가는 길목인 원천리 불미골이 이육사가 태어난 곳이고, 최근 이육사문학관이 들어선 곳이기도 하다.

남명의 자취를 더듬기 위해서는 지리산의 큰 품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옛이름이 덕산인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지리산만큼이나 무거워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없던’ 남명의 유적이 남아 있다. 합천 태생인 남명이 지리산 밑의 덕산에 자리 잡은 것은 그의 나이 61세 때의 일이었다. 젊은 날 정통 유학과 노장학 등 제자백가를 섭렵하여 박학다식한 그였지만,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으니 표표히 재야를 떠돌다가 퇴계 등의 천거마저 뿌리치고 지리산 자락에 산천재를 짓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렇듯 은인자중하였는데도 그 명성이 자자하여 제자가 되고자 한 이가 많았으니, 정구·곽재우·정인홍·이제신·김효원·문익성·하항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지리산 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학풍을 진작했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의병으로 나가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남명의 가르침이 어디에 있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산천재는 비록 서너 칸짜리 건물일 뿐이지만, 앞으로 지리산 천왕봉을 그러안고 있으니 그 품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산천재 마루에 올라 위를 올려다보면 ‘산천재’라는 현판 주위로 농부가 소를 모는 그림, 신선이 소나무 아래 바둑을 두는 그림, 버드나무 밑에 귀를 씻는 선비와 그 물을 자기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며 소를 끌고 가는 농부의 그림 등이 그려져 있다. 벽화는 낡고 헐어 그 형체를 낱낱이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거기에 스민 남명의 정신만은 뚜렷하다. 산천재 인근에는 빗돌들이 어지러운 남명의 묘소가 있으며(그 빗돌들은 남명이 사후에 겪은 처지를 보여준다), 단성중고등학교 위에는 남명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세운 덕천서원과 함께 최근에 세운 남명기념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