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제작소 ‘기후 문제해결 소셜디자이너’ 프로젝트
다다기오이를 한입 베어 문 아이가 남은 오이 조각을 접시에 내려놨다. “쓴맛이 나.” 맛보니 꼭지 쪽이 아닌데도 살짝 썼다. 일주일도 더 지난 일이다. 가뭄이 들면 오이에 쓴맛이 돈다는데, 실제 지난 6월 7일 기준 최근 6개월간 전국 평균 강수량(199.7㎜)은 평년의 절반 수준이었다. 특히 지난 5월 한 달 강수량은 5.8㎜로 기상관측 이래 가장 적었다. 올해 3~5월은 역대 봄철 중 기온이 가장 높았다.
6월 23일, 전국에서 장마가 시작됐다. 2020년 중부지방 장마는 54일 지속되면서 역대 최장, 최대 강수량을 보였다. 가뭄 이후 폭우가 내리면 침수 피해가 크다. 기존 기록을 깨는 날씨가 반복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인도가 121년 만에 4월 최고 기온을 찍는 등 올해도 지구촌 곳곳에서 이상기후 현상이 이어졌다. 한국에서는 사과 재배지가 북상하고, 프랑스에서는 반복되는 여름 고온 현상으로 와인의 알코올 도수가 높아져 골머리를 앓는다. 폭염과 폭우, 산불과 가뭄만이 아니라 혀끝과 식탁에서도 기후변화를 체감하는 시대가 됐다.
4주간 활동 결과 중간보고회
시민과 소비자는 정부와 기업이 기후위기 대응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압박할 수 있다. 때로는 좋은 정책과 제도를 먼저 제안할 수도 있다. 시민 스스로 삶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해결할 방안을 함께 궁리하고, 구체화하면서 시민은 기후위기 대응의 핵심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시민사회 싱크탱크 희망제작소가 ‘기후문제 해결을 위한 소셜디자이너’라는 이름으로 지난 3월 28일부터 추진한 프로젝트의 목적이다.
희망제작소가 작명한 ‘소셜디자이너’는 일상의 불편함을 아이디어로 해결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소셜디자이너 프로젝트의 첫 주제는 기후다. 일상에서 실천가능한 기후위기 아이디어를 시민이 제출하고, 이중 심사를 통해 선정된 18건을 공유·통합·발전시켜 실천과제를 도출한다. 이후 그룹별로 시민이 조사·연구, 실천하면서 과제를 구체화하고, 7월 9일 최종 결과를 발표한다.
그 사이인 지난 6월 11일, 서울 마포구 희망제작소에서 중간보고회가 열렸다. 앞선 4주간의 활동을 정리하고, 남은 4주간의 활동 방향을 정하는 시간이다. 모니터링, 공동체 인식, 이동, 비건 소비생활, 분리배출이라는 5가지 주제별로 팀을 꾸렸는데, 이날 팀별로 3~6명씩 참석했다.
참여자들은 5월 14일 오리엔테이션 때 처음 만난 후 대부분 온라인으로 소통했다. 약 한 달 만에 다시 만난 터라 이들은 ‘지구에 없어도 되거나 없어져도 될 것’을 주제로 먼저 말문을 뗐다. 동물착취, 폭력, 편견, 강요, 욕망, 아쿠아리움, 실내동물원, 플라스틱, 온실가스, 과소비 등의 낱말을 포스트잇에 적었다. 기후변화 인식 개선을 위한 방안을 고민하는 ‘공동체인식’팀의 한 참가자는 전쟁이라고 했다. “제일 먼저 평화가 이뤄져야 그다음을 모색할 수가 있다”고 이유를 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에너지 가격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각국이 석탄 발전 재개에 나선 걸 보면, 딱 들어맞는 지적이었다.
우리는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체감하면서도 대부분은 텀블러 들고 다니기 정도의 실천에 머물러 있다. 막상 더우면 에어컨을 틀고, 급하면 자가용을 탄다. 온실가스의 주요 배출원으로 지적받는 육식 소비를 줄이기도 쉽지 않다. 참가자들은 이런 인식과 실천의 차이를 짚고, 그 간극을 메울 방안을 고민했다. 더 배우고 깨달을 게 있고, 더 해야 할 실천이 여전히 많다.
탄소중립 돕는 길찾기 앱
초록색 명패를 단 ‘어스 로드’팀은 이동 관련 탄소 배출에 주목했다. 활동 기간 동안 직접 자가용과 대중교통 등을 이용하면서 탄소배출량을 기록했다. 휘발유 자가용으로 10㎞를 이동하면 약 2㎏의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이는 일회용 플라스틱 컵 133.3개를 사용한 것과 같은 양이다. 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그보다 3분 1 이하로 탄소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 어스 로드팀은 앞으로 4주간 이런 내용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설문조사를 벌인다. 그 결과를 토대로 길찾기 앱에 이동시간과 거리 등의 정보만이 아니라 이동수단별 탄소배출량 정보도 함께 표시해 달라고 포털 회사에 요구할 계획이다. 여력이 된다면 탄소배출량이 적은 이동수단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와 법을 정부와 국회에 요구할 생각이다.
탄소중립을 위한 길찾기 앱 아이디어는 환경관리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박현지씨가 제안했다. 장하나 의원실, 청와대에서 일한 그는 환경을 깊이 있게 공부해보자는 생각에 지난해 서울대 환경대학원에 입학했다. 지도교수이자 탄소중립위원회 민간위원장인 윤순진 교수의 ‘기후변화 시대의 지속가능한 에너지정책’ 수업을 들었는데 과제물로 에너지 일기 작성이 있었다. 매일 이동 과정에서의 탄소배출량뿐만 아니라 가전제품의 전기 사용, 가스와 수도 사용으로 발생하는 탄소배출량을 기록하는 과제였다.
박씨는 일지를 작성하면서 자신을 ‘기후악당’이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환경을 생각한다면서, 자동차하고는 한몸처럼 돼서 7~8년을 거의 자가용으로 출퇴근했어요. 계산해보니 한국 사람이 배출하는 평균보다 더 많은 탄소를 배출하고 있었죠. ‘내가 환경 악당이었구나’라고 알게 된 거죠. 주변을 보니 저처럼 환경을 위한다면서 줍깅(걷거나 뛰면서 길거리의 쓰레기를 줍는 활동)을 하고, 일회용 컵을 쓰지 않고, 쓰레기 배출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가용을 타면, 이런 노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 정도로 탄소를 배출하게 되죠.” 박씨는 정부가 전력 생산의 탄소배출계수를 공표하듯 국내 상황에 맞도록 이동수단별 탄소배출계수 통계치를 마련하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비건 안내서, 분리배출 지도도 준비
‘비비’(비건 소비)팀은 비건 소비 생활을 돕는 가이드북 성격의 카드뉴스를 만들기로 했다. 비건은 고기, 유제품 등 동물성 음식을 먹지 않고, 가죽 같은 동물성 제품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지난해 11월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농업 및 식량 분야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가 전체 배출량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1%로 나타났다. 특히 이산화탄소보다 온실효과가 강력한 메탄과 이산화질소가 그중 30%를 차지한다. 육우와 젖소는 이 메탄의 주 발생원이다. 비건을 지향하는 삶이 지구에 덜 부담을 주는 삶의 방식이지만 실천이 쉽진 않다.
비비팀원은 모두 비건이 아니다. 비비팀에 속한 정한나씨는 평소에 비건 지향적인 삶에 관심이 있어 여러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고 말했다. “비건인 사람은 까탈스럽고 예민하다, 깨어 있는 척한다는 편견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조심스러웠던 적도 있었고, 1인 가구라 가공식품을 많이 먹는데 그때 동물성 성분이 많이 들어 있어 골라 먹기가 힘든 적도 많았어요. 이 기회에 이런 불편함이나 사회적 시선을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참여했어요.”
식품이나 화장품에는 동물성 성분을 제대로 표기하지 않는 사례가 많다. 정확한 정보 제공만으로도 비건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불편함을 줄일 수 있다. 비비팀은 화장품과 가공식품, 패션 잡화 업계를 대상으로 비건 성분을 제대로 표시하고 있는지 조사하고, 비건 제품을 선택하는 올바른 방법 등을 카드뉴스로 제작할 계획이다. 지혜성씨는 “외국에는 비건을 위한 레스토랑이 많고 누군가에게 회식을 제안할 때도 채식주의자들이 있는지 반드시 물어보는 문화가 확립돼 있는데, 한국은 환경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지 않는 한 그런 질문이 나오기가 어렵다”면서 “본인이 실천에 참여하지는 못해도 비건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불편함을 겪고 있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분리배출팀은 폐의약품과 플라스틱, 종이팩 등을 분리배출할 때 도움이 되는 지도를 만드는 중이다. 구글 맵에 분리배출 거점지역을 표시하고, 별도로 웹에 분리배출 거점지역 리스트를 공개하는 작업이다. 지역별로 다른 재활용 관련 용어와 제도도 정리하고 있다. 서울대 환경대학원에 다니는 정예지씨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정씨는 코로나19 이후 약품 소비가 증가했는데 폐의약품이 하수도로 무방비하게 버려지는 사례가 많다는 사실에 착안해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폐의약품을 어디에 버려야 하는지와 관련한 정보 제공이 충분치 않고, 폐의약품 수거함을 설치하지 않은 곳도 많기 때문이다. “약국에 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약국을 찾아가 보니 지자체별로 제각각이었어요. 행정복지센터로 가라고 하는 곳도 있더라고요. 이렇게 혼선이 있으면 분리배출을 하려 해도 귀찮아 일반 쓰레기로 버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지도를 만들면 조금은 혼선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민이 연구자인 시대를 열자
모니터링팀은 시민들을 대상으로 지하철 적정 온도에 관한 설문조사를 벌였다. 앞으로 서울교통공사의 온실가스 감축 로드맵이 있는지 점검하고, 담당 공무원을 인터뷰할 계획이다. 지하철 온실가스 감축 방안을 정리해 서울교통공사에 기후위기 대응 제안서도 낼 예정이다. 기후위기 인식 개선을 위한 보드게임도 만들고 있다. 소셜디자이너들이 제안한 아이디어를 게임에 반영한다는 구상이다.
공동체 인식팀은 책과 영화, 연극 등 기후위기와 관련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이를 목록화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비건, 동물권, 제로웨이스트와 관련한 이야기 모임도 온라인으로 열 생각이다. 팀원인 송미선씨가 자료조사 중 알게 된 내용을 전한 게 흥미롭다. “아프리카에서 관광업이 과도해지면서 야생으로 차들이 수도 없이 다니다 보니 자연의 소리가 묻히게 됐어요. 치타가 자기 새끼들을 부르는데 그런 소리가 묻혀 새끼들이 많이 죽었다고 해요.” 케이티 미첼이라는 영국의 연출가이자 극작가의 사례도 들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기후위기를 주제로 작품을 만들었는데 어느 날 기후위기를 말하면서 자기가 세계 여기저기 투어를 다니는 게 맞는지 의문을 품게 됐다고 해요. 그래서 지금은 배우들이 자전거를 타면서 거기서 만든 에너지만 활용하는 연극을 만들었는데, 에너지가 얼마나 만들기 힘든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 투어를 가는 대신 극본만 보내고, 해당 지역의 예술가들이 그걸로 작품을 만드는 방식으로 바꿨어요. 원래 이런 방식의 작업은 원작을 훼손한다는 논란이 일기 쉬운데 이 분은 그런 권리를 다 포기했어요.”
소셜디자이너 프로젝트는 모든 시민이 연구자인 시대를 열어보자는 포부의 출발점이다. 임주환 희망제작소 소장은 ‘옳으니 따르라’는 방식으론 우리 사회를 밀고 나갈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임 소장은 이날 총평에서 “기후문제에 공감하는 시민들이 모여 서로 위로를 얻고, 불온하고 전복적인 상상에 대한 공감대를 넓히면서 힘도 얻을 수 있다”면서 “앞으로 사회운동은 이런 방식으로밖에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이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하겠다’는 자세로 연구자가 되어 공론장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얘기다.
희망제작소 측은 소셜디자이너들의 제안 중 정책으로 이어져야 할 내용이나 기업의 ESG경영과 연결할 수 있는 제안은 8주 과정의 프로젝트가 끝난 이후에도 연구를 계속 이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임 소장은 카카오맵과 같은 포털의 길찾기 앱에서 탄소 배출이 가장 적은 길을 안내해주는 기능도 관련 기업과 함께 개발을 추진할 생각이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