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이야기]“설마” 하던 사법부, 내부에서도 “부끄럽다”

지난 정권과 당시 사법부 수뇌부의 ‘재판거래’ 의혹이 불거지자, 대부분의 판사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검찰 수사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내부가 술렁이고 있다. 믿었던 자신들의 조직이 벌인 일들로 인해 침통함을 금치 못하고 있다.

8월 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노정희, 김선수, 이동원 신임 대법관의 취임식에서 직원들이 취임사를 듣고 있다. 청사 벽 한쪽에 전 양승태 대법원장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 김기남 기자

9월 6일 검찰이 대법원 예산담당관실과 재무담당관실,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의 서초동 법원 별관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검찰의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된 지 3개월. 비록 법관이 아닌 법원직 공무원의 사무실이지만 검찰이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를 명목으로 대법원 청사를 들어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민걸 전 기조실장에 대한 강제수사가 이뤄진 것 역시 앞으로의 수사 전개과정에서 눈여겨볼 부분이다. 검찰은 “이 전 실장에 대한 압수수색은 일제 강제징용 사건과 관련한 재판거래 의혹, 법관모임 중복가입 금지조치 등에 관여한 혐의가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의 라인에서 다소(?) 벗어나 있던 이민걸 전 실장에 대해 강제수사가 들어간 것은 검찰이 임 전 차장과의 연결고리 외에 ‘이민걸-양승태(전 대법원장)·박병대(전 법원행정처장)’의 연결고리를 찾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검찰은 앞으로도 강제수사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영장기각률 90%라는 초유의 기록을 세우고 있는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부 3인 부장판사들도 더 이상 사법부의 수문(水門)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판결을 내리는 주체에서 판결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 판사들은 지금도 계속 소환조사를 받고 있거나 기다리고 있다. 일선 판사들 사이에서는 “번호표를 들고 기다리고 있는 신세”라는 자조적인 표현을 쓰기도 한다. 전국 약 3000명 남짓한 판사들 가운데 검찰의 기소대상은 20명. 전체 판사의 1%에도 못미치는 숫자다. 그 극소수의 법원행정처 출신 판사들이 사법부의 주요 의사 결정을 좌지우지해 왔다는 의미다. 대다수의 판사들은 법원행정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재판을 하지만 극소수의 판사들이 벌인 사법농단에 사법부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

먼 훗날 국민들이 기억하는 2018년 사법부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일부는 검찰 수사가 시작되기 전 각 법원에서 열린 판사회의와 법관대표회의를 두고 ‘6차 사법파동’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역대 사법파동은 외압에 맞서 재판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판사들의 움직임이었다면 현재의 모습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법 혼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그동안 재판거래 및 사법행정권 남용, 판사 블랙리스트 등에 대한 진상규명을 외치던 일선 판사들은 침묵하기 시작했다. 사태의 추이를 살펴봐야 한다는 말만 할 뿐이다. 이면에는 자신들이 상상한 것 이상의 불법적 행위가 법원행정처에서 자행돼 왔다는 것에 대한 당혹감이 담겨 있다.

판결자에서 판결을 받을 대상으로

엘리트 의식에 젖은 극소수의 법원행정처 출신 판사들이 사법부를 망쳤다는 비판도 나오지만 술자리에서나 들을 수 있는 지적이다. 지방의 한 판사는 “우리도 검찰 수사가 어디까지 흘러갈지 알 수 없는 상황이고, 현재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모든 일들은 이미 일선 판사들의 상상을 뛰어넘었다”고 말했다. 일부 판사는 술 기운을 빌려 “환멸을 느낀다”고 했다.

A부장판사는 지난 5일 “나는 양 원장이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사법개혁은 정말 물 건너갔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고 말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지난 6월 1일 경기도 성남시 자택 앞에서 한 차례 기자회견을 했다. 양 전 원장은 그 자리에서 재판거래도, 특정 법관에 대한 불이익을 준 적도 없다고 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대법원장으로 재직하며 대법원의 재판이나 하급심의 재판 등에 부당하게 관여한 바가 결코 없다. 하물며 재판을 흥정거리로 삼아서 방향을 왜곡하고 그것으로 거래를 하고 그런 일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양 전 원장은 재임시절 일선 판사들에게 많은 신망을 받는 사법부 수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중견 판사들은 양 전 원장이 이날 기자회견에서 단언한 말을 빌려 “문건이 오버한(과장된) 측면은 있지만 그게 전부일 뿐 재판거래는 있을 수가 없다”고 했다. 양 전 원장의 기자회견은 그들이 하는 발언의 보증수표 같은 것이었다. A부장판사 역시 지난해부터 줄곧 “재판거래는 결단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주장해 온 사법부 구성원 중 한 명이었다. 일부 부장판사 중에는 농담을 빌려 “재판거래 증거가 단 하나라도 나오면 내가 옷을 벗겠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A부장판사는 “이제 더 이상은 모르겠다”고 했다. 이번 사태에 대해 함께 의견을 나누던 부장들도 더 이상 검찰 수사를 입에 담지 않는다고 했다. A부장판사는 여러 차례(신원을 밝힐 수 없어 행정처 재직 횟수는 밝히지 않음) 법원행정처와 대법원(재판연구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역대 대법원장부터 대법관, 처·차장, 실·국장을 지근거리에서 모시거나 동료로서 함께 근무해 왔다. 그런 그의 입에서 “모르겠다”는 말이 나왔다.

“있을 수 없다”에서 “모르겠다”로

“이규진 부장(사건 발생 당시 양형위원장이자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장)이 이탄희 판사에게 ‘판사 뒷조사한 자료가 있다’라든지 국제인권법 와해 관련 작업을 지시했다는 등의 언론 보도가 나왔을 때만 해도 ‘이 부장이 평소에도 좀 그러시더니(말을 가려 하지 않는다는 뜻) 결국 저 사달이 났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이후에 임종헌 차장이 심의관들에게 각종 문건을 ‘무리하게’ 작성하도록 지시했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도 ‘임 차장 평소 성격대로네’라고만 생각했지 이게 사법행정권 남용이라든가 재판거래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차한성 법원행정처장(전 대법관)이 김기춘(청와대 비서실장)의 공관으로 그 늦은 시각에 찾아갔다는 보도를 봤을 때는 ‘이거, 내가 생각했던 게 전부 잘못이었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차한성 처장 보도부터였던 것 같다. 대통령도 아니고 일개 비서실장이 부른다고 법원행정처장이 가는 게 말이 되나. 재판 진행과정에서도 문제가 있을 수 있는 행동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재판거래는 없다는 말을 못하게 됐다.”(A부장판사)

차한성 전 대법관의 이름이 언론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지난 8월 14일이다. 이언학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앞서 8월 2일 외교부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검찰에 발부했다. 검찰은 외교부 공관 압수수색 과정에서 ‘김기춘-차한성-윤병세’ 비밀회동 문건을 발견했다.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2013년 말 차한성 당시 법원행정처장(대법관)과 윤병세 외교부 장관을 자신의 삼청동 공관으로 불러 일제 징용사건 재판 진행을 논의한 이른바 ‘삼청동 비밀회동’을 가졌다는 것이 외교부 문건에서 드러났다. 논의는 한 차례에서 그치지 않았다. 2014년 10월 차한성 처장에 이어 행정처장을 맡은 박병대 당시 법원행정처장(대법관) 역시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의 ‘부름’을 받고 또다시 공관으로 들어갔다. 그 자리에는 조윤선 청와대 정무수석, 정종섭 안전행정부 장관 등이 동석했다. 정치가 아닌 법의 논리로 피해 여부를 판단해야 할 사법부가 정치인들과 재판 진행 방향을 논의한 것이다.

2012년 5월 당시 대법원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 등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린 1·2심 결론을 뒤집고 전범기업의 배상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파기환송심을 맡은 고등법원에서도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지만 2013년 8월 전범기업이 대법원에 재상고했다. 이미 대법원의 결론은 내려진 상태였고, 상고 기각을 하면 전범기업에 대한 대한민국 사법부의 판단은 그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재상고된 사건은 5년간 대법원 캐비닛에 들어가 나오지 않다가 최근에서야 전원합의체에 회부됐다. 전합으로 간다는 것은 사건을 다시 볼 수도 있다는 의미다. 좋은 의미로는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불가역적인(되돌릴 수 없는)’ 전범기업 책임 인정 판결을 내리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나쁜 쪽으로 보자면 ‘전범기업에 배상책임이 없다’는 것으로 결론이 바뀔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개도 법원행정처가 2013년 9월 작성한 문건에 명시된 시나리오와 동일하게 이뤄졌다. 해당 문건에는 대법원 재판부가 정부에 의견서 제출을 요구하면, 외교부가 ‘일본과의 분쟁이 우려된다’는 의견서를 제출하고, 이를 토대로 대법원 소부가 아닌 전원합의체에 회부한다는 계획이 기재돼 있다. 시간끌기를 하면서 결과적으로 판결 자체를 뒤집으려는 목적인 셈이다. 이들이 비서실장 공관에서 사법농단을 하는 사이 2018년 현재 소송을 낸 고령의 강제징용 피해자 9명 중 7명이 세상을 떠났다.

지난 5월 3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열린 ‘일제강제동원피해사건 재판거래와 대법원 사법권 남용 문제 대응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긴급 기자회견’에 참가한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이 판결의 정치적 거래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 노도현 기자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의 주도적 농단’ 정도로 애써 이 사건을 바라보던 일선 중견 판사들도 ‘차한성’이라는 이름이 나오면서부터 동요하기 시작했다. 차 전 대법관은 사법부 내에서 신망이 두터운 고위법관 중 한 명이었다. 그를 롤모델로 삼는 법관도 있었다. 그러나 차 전 대법관 역시 철저히 법원행정처 요직 라인을 거쳐 온 인물이다. 행정처 인사관리 심의관-기획조정심의관-사법연수원 교수-행정처 건설국장-사법정책연구실장-서울중앙지법 파산수석부장-청주지법원장-법원행정처 차장을 거쳐 대법관에 올랐다. B부장판사는 “재판거래라는 것은 결과의 유·무죄를 뒤집는 것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B부장판사는 “사법부가 온갖 이상한 문건을 만든 것은 ‘쪽팔리는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부끄러워진 지점은 더 이상 재판거래가 없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공정한 재판이라는 것은 결과가 옳으냐, 그르냐를 보는 게 아니다. 공정한 재판이라는 것은 그 과정 역시 투명하고 법이 정한대로 판단했다는 외관 역시 갖춰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차한성’이라는 이름 나오자 동요

검찰은 점점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5일 <주간경향>과의 전화통화에서 “우리는 끝까지 간다”고 했다. 당초 올해 말까지 수사를 마무리하겠다는 이야기가 서초동 내부에서 들려왔지만 이날 검찰 관계자는 “기한을 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미 검찰은 일선 판사들이 예상한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 이상의 것들을 밝혀낸 상황이다. 헌법재판소에 파견된 판사로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 관련 헌재 평의내용 및 인사평판 등 내부정보를 빼돌리고, 서울 서부지법 기획법관으로부터 집행관 비리사건 수사기밀을 빼오도록 하고, 상고법원 추진을 위해 일선 법원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하는 등 각종 비위사실을 발견했다.

C부장판사는 “참 씁쓸하다”고 했다. 행정처를 단 한 번이라도 거친 20년차 안팎의 중견 판사들은 지금의 사법행정권 남용의혹에 자신들도 가담자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괴롭다”고 말했다. “ㄱ부장이든, ㄴ부장이든, ㄷ부장이든 그 보직에 있으면서 윗선으로부터 내려오는 지시에 ‘못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행정처 내부에는 없었다. 나도 ㄱ부장이 거친 보직을 거쳤다. 만약 내가 그 시기에 ㄱ부장이 근무하던 보직에 있었다면 내가 지금 검찰 조사를 받는 신세가 됐을 것이다. 나도 ‘못 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검찰은 범죄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게 관행이었다.”(C부장판사)

법원은 그러나 90%에 육박하는 영장 기각을 통해 사실상 ‘수사방해’를 하고 있다. 한 판사는 “영장전담조에서는 검찰이 무리한 (영장)청구를 하거나 혐의가 명확하지 않은 청구를 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고 했다. 검찰이 영장청구의 기본적인 요건을 갖추지 않고 영장청구를 했기 때문에 기각했을 뿐 다른 의도가 담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잇단 영장 기각에 대해 법원 내부에서도 단독판사들을 중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한 단독판사는 “대부분의 판사들이 (영장전담을 하지는 않아도) 당직을 서면서 영장을 다룬 경험들이 다 있다”면서 “그런데 지금 영장전담부의 행태를 보면 마치 자기네들이 무죄를 확신하고 검찰의 공격을 막아내는 역할을 한다고 착각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가 자기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판사들이 공유하고 있는 의견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검찰은 <주간경향>과의 통화에서 “(영장이 계속 기각되더라도) 돌아가면 된다”고 했다. 또 “우리가 확보한 것은 진술만이 아니다. 팩트(물증)다. 법원행정처에 대한 영장을 기각하면 다른 곳에서 증거를 찾으면 된다. 그 누구도 팩트는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

“웃기는 게 뭔 줄 아나. 대한민국에서 제일 영장이 안 나올 곳은 외교부였다. 그런데 법원은 외교부에 대한 영장은 내줬다. 같은 혐의로 청구한 법원행정처는 막아버리고. 정작 외교부에서 상상하지도 못한 재판거래 정황(강제징용 배상판결)이 나왔다. 우리는 출구를 생각하지 않는다. 국민들이 제일 신뢰하지 않는 검찰을 지금 지지하는 이유가 뭔 줄 아나. 사법부가 잘못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법원이 계속 영장을 기각해도 간다. 열 배쯤 더 돌아서 가야 하지만 그러면 우리는 열 배 더 인력을 동원하면 될 일이다. 법원은 대충 덮어주고 임 전 차장을 불구속기소하는 선에서 마무리하고 싶겠지만 그렇게 검찰 수사를 마무리하면 사법부가 예전의 위상과 신뢰를 찾을 것 같나. 아니다. 지금이라도 검찰과 맞설 게 아니라 잘못된 것을 들여다보고 처벌이 필요하면 처벌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검찰 관계자)

촛불재판 개입 논란 진상조사단장 맡았던 김용담 전 대법관

2009년 2월 언론 보도를 통해 처음으로 신영철 당시 대법관의 서울중앙지법원장 재직 시절 ‘촛불재판’ 개입사건이 불거졌다. 전국적으로 법원 판사회의가 이어졌다. 판사들은 명확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판사들에게 양보할 수 없는 가치인 재판 독립을 훼손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대법원은 진상조사에 착수했고, 신 대법관은 대법관으로서는 사법부 역사상 최초로 윤리위원회에 회부됐다. 조사단은 “재판 개입이자 사법행정권 남용으로 볼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용담 당시 법원행정처장이 신영철 대법관 촛불사건 개입과 관련, 2009년 4월 20일 충남 천안 상록리조트에서 열린 '전국 법관 워크숍’에서 모두 발언을 마친 뒤 퇴장하는 모습. / 남호진 기자

조사단과 대법원장은 다만 거취 결정은 신 대법관 스스로 정하도록 했다. 우리 헌법 제106조 1항은 ‘법관은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파면되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태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소장판사들이 계속해서 단독회의를 열어 용퇴를 촉구했다. 신 대법관의 동료이자 4기수 아래 후배이기도 한 박시환 대법관은 언론을 통해 당시 상황을 ‘제5차 사법파동’으로 규정했다. 또 촛불재판 개입사건을 개인의 일탈행위로 치부하고 넘어가면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법부 수장인 이용훈 대법원장이 신 대법관에게 엄중 경고를 내리고, 대국민 사과를 하는 것으로 사태는 마무리됐다. 신 대법관은 대법관 임기 6년을 채우고 2015년 2월 퇴임했다.

정확히 9년 만에 박시환 전 대법관의 ‘예언’은 현실이 됐다. 사법부는 여전히 ‘재판 개입’ 또는 ‘재판거래’는 없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하지만 사법부 바깥의 사람들은 이들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 판결이 판사와 외부세력의 결탁으로 오염됐다고 확신한다.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재판 개입 논란 진상조사단장을 맡았던 인물은 김용담 당시 법원행정처장(71·사법연수원 1기)이었다. 김 전 처장은 2009년 퇴임했다. 퇴임 후에도 유력한 차기 대법원장 후보 중 한 명이었지만 제15대 대법원장 자리는 양승태 대법관에게 돌아갔다.

<주간경향>은 최근 김용담 전 대법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김 전 대법관은 요청을 완곡히 거절했다. 그는 “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것이 법원에 득이 되기보다는 누가 될 것”이라며 “나는 입이 열 개라도 뭐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김 전 대법관에게 ‘만약 지금 행정처장으로 있었다면 이번 사태를 어떻게 처리했을 것 같나’라는 질문을 했지만 답변을 들을 수는 없었다. 다만 현재 사법부에 있는 판사들에게 “본분을 지켜라”고 당부하며, 김 전 대법관은 과거 자신이 배석판사와 행정처 심의관·담당관들에게 했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나는 사법부를 오래 떠나 지금의 일(사법행정권 남용의혹)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나 같은 늙은이의 말은 더 이상 중요하지도 않다. 다만 내가 법원에 있을 때 우리 배석(판사)에게도 그렇게 말했고, 행정처장일 때는 심의관과 담당관에게도 이야기한 말만 하겠다. ‘사람이 살면서 잘못을 안할 수는 없다.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딱 거기에서 멈추고 원칙이 뭔지를 살펴보고, 처음부터 원칙대로 해야 한다. 잘못한 것을 변명하거나, 그것을 시정한답시고 술수를 부리려 하면 절대 안 된다.’ 나는 그때 후배 판사들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김 전 대법관으로부터 더 이상의 말은 들을 수 없었다. 다만 그가 판사 임기 37년 5개월을 마감하며 발간한 책 <판결 마지막 이야기>에서 김 전 대법관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이 책은 퇴임 직전인 2009년 9월에 발간됐다.

“다만 사법개혁이 문제될 때마다 아쉽게 느껴지는 점이 있다. 스스로 문제를 보지 못할 때에는 밖에서라도 지적해줘야 한다. 또 외부의 지적과 촉구가 사법개혁의 원동력이 되고 탄력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법원 내부에서 사법개혁을 주장할 때, 나는 때때로 걱정하곤 한다. 그 시기가 독자적이지 않고 외부에 의존적일 때, 그 방법이 법관답지 못하고 정치적일 때, 그 표현이 사법의 신뢰를 해치는 자해적인 것일 때, 그 내용이 더 나은 재판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핑계 삼아 자기의 처지를 향상시키려는 것일 때, 당황하게 된다.”

“그래서 부탁하고 싶다. 늘 그렇다고는 하지만 사법제도에 있어서는 특히 그 결함을 지적하고 부수기는 쉬워도 올바른 대안을 찾아 세우기는 몹시 어렵다. 더욱이 문제의 본질이 사법 내재적인 것이 아니고 사법 외적인 요인에 의해 지배되는 것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본문 162~163페이지)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