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우리는 아직도 신분제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 사회의 신분제는 메르스 관련 재화 분배 양상에서도 나타난다.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재화는 효율적으로 분배되지 않는다. 그것은 암묵적 계급에 따라 분배된다.

위기상황은 평소에 보이지 않던 것들을 드러내 준다. 개인의 성격, 숨겨왔던 의도는 물론 단체가 구성원을 대하는 방법이나 정부가 국민에 대해 평소에 갖고 있던 생각 역시 위기상황에서 드러나게 마련이다. 최근 많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메르스 전염 사태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이 경험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나는 다음의 문장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메르스가 아니면 해당 병원이 책임지라.”

급진적 여성주의 신학의 대표적 인물인 메리 데일리는 “하느님이 아버지면 아버지가 하느님”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체험들을 통해 신의 생각과 행동을 개념화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신을 무조건적 순종을 요구하는 하늘의 가부장으로 생각했고, 그의 징벌을 두려워하거나 그의 그늘을 떠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것이 개념적 은유의 힘이다. 우리의 삶은 실제로 은유에 의해 좌우된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시간을 돈처럼 생각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아끼거나, 남에게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너 때문에 시간을 버렸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표현의 근거가 이 은유에 있다.

메르스에 대응하는 우리 정부의 태도는 어떤 은유 위에 서 있는가. 내가 제시하고 싶은 은유는 “정부는 양반, 국민은 상놈”이다. 위의 인용문이 나온 맥락을 짚어보자. 중동에 다녀온 한 환자가 이름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고, 세 번째 찾아간 병원에서 메르스 의심 환자로 분류된다. 질병관리본부는 의사에게 메르스일 가능성이 적으니 다른 검사들을 먼저 해 보라며 의사의 검사 요청을 거부한다. 환자 가족들은 자신의 친인척이 ‘정부 기관’에 있다는 말로 질병관리본부를 압박하고, 이에 검사가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한국에서 5년 이상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분위기를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윗사람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는 자신이 ‘윗사람’인 정부로부터 압력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랫사람’인 의사는 애초에 ‘윗사람’에게 무언가를 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언제나 군대에서의 기억들이 나를 괴롭힌다. 선임병들은 항상 자신들이 귀족인 양 행세했다. 후임이 선임을 부를 수도 없는 것이며,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고, 잠든 선임을 깨울 때에 몸에 손을 댈 수도 없었다. 왜 군대에 갔다 오면 사회생활을 잘한다고 하는가. 바로 이 감각 때문이다. 권력을 대하는 ‘아랫사람’의 자세가 가장 극적으로 학습되는 곳이 군대다. 우리는 아직 신분제가 철폐되지 않은 세상에 사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신분제는 메르스 관련 재화의 분배 양상에서도 나타난다. 효율성을 생각할 때에, 메르스 관련 방역장비를 가장 먼저 지급받아야 하는 이들은 환자를 직접 만나는 구급요원과 의료진이다. 그러나 발생 초기에 구급요원은 애초에 지급 대상으로 고려되지 않았을 뿐더러 간호사들에게 지급된 장비는 정부 권고안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재화는 효율적으로 분배되지 않는다. 그것은 암묵적 계급에 따라 분배된다. 더 좋은 장비는 당연히 더 높은 계급을 가진 이들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천한 사람들이 국가가 제공하는 보호의 우선순위에서 제외되는 것은 그들이 보기에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

메르스가 아니면 책임지라며 적반하장 격의 호통을 치는 ‘윗사람’들은 질병관리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병으로 회사를 하루 쉬어야 하는 직장인들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지각한 학생들은 항상 그런 태도의 상전들 앞에 서야 한다. 그 굴욕감에 쓰러지지 않고 권리를 쟁취해 내는 것이 먼저다. 법에만 없지 실제로는 존재하는 신분제 안에서는 그들이 허락하는 만큼의 자유와 권리만이 허용될 뿐이다. 역사책에서 배운 프랑스 혁명은 과거가 아닌 우리의 미래에 있다.

<여정훈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