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원의 에브리컬처]결혼의 계절, 사회·축가 ‘과욕의 무리수’

이 햇살 화창하고도 예식장 빡빡하고도 에브리 비용 치솟는 ‘결혼의 계절’에 결혼식을 무사히 마치려면, 평생의 귀감 되는 주례사보다는 당장에 도움이 되는 약간의 행운이 더 요긴하지 않을까.

얼마 전 집의 가구가 망가져서 새로 들이려고 했더니 요즘은 ‘결혼시즌’이라 한 달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결혼시즌이라니, 좀 놀랐다. 국내 신혼여행이 점점 줄어드는 요즘에 아직도 그런 개념이 있다니.

아무튼 휴가철 관광지스러운 냄새를 강렬히 발산하는 이 ‘결혼시즌’이라는 단어로 인해 나는 주변 지인들의 결혼식 부역(이라 함은 결혼식 사회와 축가) 경험담들을 새삼 떠올렸던 바, 차마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그 이야기들 중 대표적인 것 두 개만 이 자리에 소개하고자 한다.

A씨의 첫 결혼식 사회는 절친한 대학 동창의 결혼식에서였다. 난생 처음 사회를 부탁받은 A씨는 한사코 거절 및 만류했다. 하고 많은 친구들 중 딱히 달변가도 아니고 예능감 출중치도 않은 자신을 굳이 사회자로 기용하는 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A씨의 친구는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소심한 친구의 반항을 제압한다. “그냥 니가 해. 립싱크를 해도 좋으니까.”

이러한 절절한 우정의 부르심을 감히 거절할 수는 없었던 A씨. 하지만 ‘매끄러운 진행’과 ‘모두의 기억에 남는 이벤트’라는 결혼식 사회의 양대 과제를 만족시킬 노하우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던 그는 결혼식에 왕림하실 모든 분들에 대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여 A씨는 당시 그의 지인들 중 최고의 달변인 데다가 효도잔치 풍의 어르신 조크에도 능하고, 무엇보다도 결혼식 사회 경력 20회 이상에 빛난다고 자부하던 직장 친구에게 긴급히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결혼식 | 레이디경향

인간관계 초토화시킨 첫 결혼식 사회
이 A씨의 직장 친구 겸 결혼식 사회 코치가 가르쳐준 여러 테크닉 중 가장 핵심을 이루는 포인트는 바로 이것이었다. ‘결혼식 당사자들을 띄워주는 조크를 적당히 섞어서 분위기를 띄울 것.’

숙련자답게 그는 이에 대한 구체적 실행방안까지 갖추고 있었다. 예컨대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과의 사진 촬영 순서가 되면 자연스럽고도 짐짓 진지한 표정과 말투로 이런 멘트를 날린다. “신랑 신부의 친구들과 직장 동료분들께서는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신랑의 하버드대 동창들은 오른쪽에 서 주시고, 신부의 캠브리지대 동창들은 왼쪽에 서주시고 운운….”

비록 하버드·캠브리지를 나오진 않았어도 충분한 지성과 학식을 갖춘 A씨는, 아무래도 그 조크는 너무 저차원적인 데다가 학벌 중심적 사고방식에 그닥 호감을 못 느끼는 자신의 평소 생각과도 너무 동떨어진 멘트인 것 같다는 항의를 (학생 입장이므로 매우 다소곳하게) 했다. 하지만 그의 코치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권위의 한 마디로 단번에 그를 제압한다.

“어른들께서 좋아하셔.”

아아, 뭐라겠는가. 어르신들, 특히 신랑 신부의 가족들이 좋아하신다는데. 하여 A씨는 결혼식이 열리는 당일까지, 그리고 예식장에서 제공한 식순대로 사회를 보고 있던 동안까지도 내내 ‘하버드, 캠브리지, 하버드, 캠브리지…’를 구구단 암송하듯 계속하여 되뇌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친구 동료 사진 촬영 시간. 이 단 한 번의 조크를 위해 거의 이틀 이상 스스로를 단련시켜 왔던 A씨는 목소리마저 가녀리게 떨어가며 위 멘트를 날리기에 이른다.

확실히 그 멘트는 식권 챙기기와 식당 위치 묻기 등등으로 분주하고 산만하던 하객 일동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일순 얼어붙은 침묵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식장 곳곳에서 들려오던 그 진지하기 짝이 없는 수군거림을 A씨는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한다. “신랑이 하버드 나왔어?” “신부가 캠브리지 출신이야?” 수군수군 수군수군….

이어 사진 촬영이 끝나고 난 다음 학교 친구들과 선배들이 곁을 지나가면서 싸늘한 눈초리로 한 마디씩 날린다. “어이, 하버드-” “하버드 동창생-”

그 뒤로 한동안 동창들 사이에서 A씨의 이름은 ‘하버드’로 대체되었고, 이후 그에게 결혼식 사회를 요청하는 동창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모르긴 해도,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A씨를 가장 슬프게 했던 것은 그를 사회로 발탁했던 친구로부터의 연락이 뜸해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친구가 결혼 직후 일 관계로 해외로 나가게 됐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더구나 그 뒤로 A씨는 직장 친구 겸 코치와 한동안 서로 책임공방을 벌이기에 이르렀으니, 그의 첫 결혼식 사회는 주변의 인간관계를 일시적으로나마 초토화시킨, 명실상부한 인간관계의 부비트랩이었다 할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결혼식 축가 요원으로 차출되었던 B씨의 이야기다. B씨는 내가 예전 클럽에서 연주를 하며 알게 된 기타플레이어 겸 보컬인데, ‘보컬’이라고는 하지만 블루스록이 전문인 B씨의 목소리는 우리나라의 결혼식 축가에 걸맞은 고음역 넘나드는 미성은 절대 아니다. 하여 그는 이 방면으로는 완전히 방심을 하고 있었는데, 이 넓은 세상에는 정말이지 다양한 취향과 개성이 존재하여, 그에게도 결혼식 축가 요청이 들어오는 기현상이 벌어지기에 이른다.

물론 B씨 역시 A씨와 같은 헛된 저항 뒤, 현명하게도 타협안을 제시한다. 나는 기타 연주만 하겠다. 대신 노래는 다채로운 축가 경력에 빛나는 또 다른 친구 C씨에게 맡기자. 그게 너의 결혼식과 우리의 우정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에 대한 결혼 당사자의 답은 이랬다. “좋아. 그럼 선곡은 무조건 내가 원하는 걸로.”

하여 B씨는 축가 경력 화려한 C씨가 부르는 그 흥겨운 스티비 원더 버전의 ‘For Once In My Life’를 드럼도, 베이스도, 브라스 섹션도, 백코러스도 없이, 오로지 기타만으로 떠받쳐야 하는 사지(死地) 한가운데로 내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의뢰인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원곡 그대로’.

베토벤 교향곡을 단소로 부는 것 같은 축가
이 노래를 아시는 분께서는 아시겠지만, 이 곡을 별도의 편곡이나 제대로 된 밴드 없이 덜렁 기타 한 대라는 고독한 편성으로 연주하고 부르는 것은 거의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단소로 부는 것과 거의 흡사한 효과를 낳게 된다. 하지만 거의 40분 단위로 결혼식을 돌려대던 그 결혼식장에서 제대로 된 편성의 연주를 위한 세팅이나 리허설 같은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B씨는 이것을 몰랐던가? 물론 알았다. C씨는 몰랐던가? 알았을 것이다. 필시. 하지만 그들은 그들 앞에 놓인 사지를 향해 묵묵히 걸어갔다. A씨가 ‘하버드 동창생’ 조크를 날린 직후와 거의 흡사한, 북극해보다도 차갑고도 고독한 청중 반응 한가운데를 향해 우정의 논개 되어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아갔다. 왜! 결혼하는 친구가 원한다잖아!

다행히 이 경우엔 우정의 부비트랩 현상은 없었다. 결혼 당사자는 무척이나 고맙게도 “‘나는’ 좋았어…”라는 반응을 돌려주었다. 하지만 그 결혼식 이후 B씨는 매우 아끼고 사랑하는 곡 하나를 달의 뒷면보다 멀고 어두운 기억의 저편으로 떠나보내야만 했다.

한동원의 에브리컬처

단순히 이야기를 전하는 나에게마저도 사무치는 고통이 느껴지는 이 두 개의 실패담을, 이제 막 결혼이라는 모험을 시작하는 모든 커플들에게 일종의 액땜용 부적 삼아 바친다. 이 햇살 화창하고도 예식장 빡빡하고도 에브리 비용 치솟는 ‘결혼의 계절’에 결혼식을 무사히 마치려면, 평생의 귀감 되는 주례사보다는 당장에 도움이 되는 약간의 행운이 더 요긴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결혼식 이후의 삶에서도 대개 그렇듯이.

<한동원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