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부당전보’ 후 가시밭길 원직 회복

법정투쟁으로 선뜻 못 나서… 사측은 큰 손해 없이 취소하면 그만

“인간의 두려움은 예측 불가능성에서 자라난다.” 부당해고보다 부당전보가 더 무섭고 대응하기 힘든 이유다. 실제로 해고를 당한 많은 노동자들이 곧바로 소송을 일으킨다. 당장 처자식과 살길이 막막해졌는데 길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당연히 법이 빠질 수가 없다. 하지만 전보는 다르다. 처지가 약한 노동자에게 절박함이 아닌 두려움을 준다. 괜히 시끄럽게 했다가 회사와 완전히 틀어지면 해고에 이른다는 공포가 생긴다. 최근 들어 기업들이 노동자의 일부만 해고시키고 다수를 전보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전보로 겁을 먹은 노동자가 소송을 걸고 회사를 향해 싸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부당전보에 소송을 걸고 판결을 받은 사람도 언론사 기자, 의사, 대규모 노조 노조원 등 발언권이 있고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다. 부당전보 판결에서 근거로 인용되는 대법원 판례도 언론사가 당사자다.

KT가 계획적으로 노동자들을 부당해고와 부당전보했다고 2012년 9월 은수미 민주통합당 의원이 공개했다. 당시 전보와 해고를 당한 피해자들이 대법원에서 최근 구제받았지만, 사측의 고의적 탄압 부분은 인정되지 않았다. / 강윤중 기자

부당해고와 부당전보를 동시에
세계일보는 1997년 파업에 참가한 기자 21명을 업무직으로 발령했다. 미디어섭외부, 문화사업국, 홍보제작부 등으로 보냈다. 반발하자 다시 해고했다. 기자들은 노동위원회를 찾아가 이의를 제기해 구제받았다. 그러자 회사 측에서 소송을 제기했다.

세계일보는 재판에서 “누적 적자로 인해 편집국 축소가 불가피하여 능력평가를 통해 타 부서로 전보발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기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2000년 당시 대법원 판결을 요약하면 이렇다. “언론사에서 기자직과 업무직은 상당한 차이가 있고, 입사할 때부터 기자직이었고 장래에도 같은 직종에서 근무하리라 생각했다. 당사자들의 생활상 불이익은 큰 반면 회사의 업무상 필요성은 작다. 전보발령을 하면서 사전협의나 동의도 구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부당해고와 부당전보가 동시에 이뤄진다. 2012년 전국언론노조 MBC본부는 김재철 사장 퇴진과 공정방송을 요구하며 파업했다. 기자와 PD 등 40여명이 정직·해고되고 100명 가까이가 전보발령됐다. 신사옥건설단으로 선거방송기획단 기자를, 용인드라미아 개발단으로 스포츠제작국 PD를, 서울경인지사 제작사업부로 정치부 기자를 보냈다. 해고에 정직에 어수선한 상황에서 전보는 작아 보였다. 그래도 전보발령은 소송으로 이어졌고, 서울남부지법은 인사의 효력을 정지시켜 원직을 회복시켰다.

이 사건에서 법원이 제시한 이유는 세 가지다. 세계일보 판결에서 나온 기준이 자리를 잡았다. 회사의 전보인사가 부당하게 느껴진다면 이 세 가지를 체크하면 된다. 회사의 업무상 필요성, 노동자의 업무상·생활상 불이익, 정당한 절차 여부다. MBC 사건에서 법원이 밝힌 이유를 보자. “첫째, 기자·아나운서·PD로 일해온 직원들을 신사옥건설단 등에 보낼 업무상 필요가 없다. 둘째, 기자·아나운서·PD로 입사해 일하면서 이후에도 전문성을 쌓을 것이라는 기대가 침해돼 불이익이 크다. 셋째, 전보발령 전에 사전협의가 없었고, 노동조합에 사전통보도 없었다.”

MBC의 부당전보 인사에 무효 결정을 받아낸 신인수 변호사(법무법인 소헌)는 전보 인사가 모멸감을 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자를 해고하면 곧바로 소송으로 이어지고 사측이 재판에서 질 수도 있다. 한국도 엉터리 후진국이 아니라 이제는 해고가 간단한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전보는 효과가 있다. 모욕감과 모멸감을 주어 제 발로 나가게 만들 수 있다. 아무리 잘 참는다고 해도 한두 달 버티기가 힘들다.” MBC 기자들은 예외적으로 사회적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모멸감까지는 느끼지 않고 법정 투쟁을 벌인 것이다.

MBC 김수진 기자가 2012년 6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해고된 동료 기자의 복직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하지만 김 기자 본인도 장기간 대기발령을 받았으며, 불이익이 이어져 지난해에는 드라마마케팅부로 발령났다. / 정지윤 기자

대법원, 정신적 고통 보상에는 인색
부당전보라고 판결을 받으면 임금손해분도 돌려받는다. 일을 아예 하지 않은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용어가 다소 생소하지만 대법원의 판결을 그대로 읽어보면 이렇다. “부당의 경우 근로자가 이에 불응하여 전직명령의 효력을 다투면서 전직발령지에서 근로를 제공하지 아니하는 경우 이는 부당한 전직명령을 한 사용자의 귀책사유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근로자는 전직명령 시부터 원직복귀 시까지의 기간 동안 종전 근무지에서 계속 근로하였을 경우에 받을 수 있는 임금의 지급을 청구할 수 있다.”

하지만 정신적 고통에 대해서는 인색한 편이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사측으로서는 부담이 적은 셈이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손해보지 않는 장사다. KT 직원 원모씨는 지난 12일 대법원에서 부당한 인사발령에 대한 손해배상금 200만원을 확정받았다. 1심은 100만원이었다가 그나마 2심부터 200만원이 됐다. 2009년 전북 마케팅단 고객서비스팀 현장지원 내근에서 현장개통 담당으로 발령받았다. 참고로 소송으로 대응한 그는 2010년 비연고지로 발령받았고 2011년 해고됐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부당전보 취소와는 별도로 부당노동행위임을 확인받을 필요가 생긴다. 회사가 인사권을 악용해 노조를 괴롭히는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그래야 이런 일이 재발되는 것을 막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 부분에 아주 까다롭다. KT 원모씨 사건도 위자료를 물어주라는 판결까지 나왔지만 부당노동행위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원씨가 제기한 부당노동행위 확인 소송에서 대법원은 “인사권 남용은 인정되지만, 부당노동행위로 볼 수는 없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이 설명하는 이유를 보면, “직무변경은 경영진의 변경에 따른 현장조직 강화를 위한 조직개편 과정에서 전북 마케팅단 소속 3급 이하 직원 중 380명을 대상으로 한 2009년도 정기인사 중에 이루어졌던 점 등에 비추어 보면, 회사의 부당노동행위 의사에 의하여 이뤄진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이다. 대법원으로서도 법리의 한계가 있겠지만, 대기업이 이 정도 머리는 쓴다는 점을 외면한 것도 아쉽다.

김기덕 변호사(법률사무소 새날)는 “부당전보 금지는 근로기준법에 정해져 있고 소송에 걸리면 회사가 불법이 아님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부당노동행위는 노동조합법에 있는데 불법임을 노동자가 밝혀내야 한다. 노조활동을 했기 때문에 전직당한 게 확실한데 입증자료가 없다. 부당노동에 대해 대법원이 너무나 엄격하게 본다. 이렇게 엄격하게 판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