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자기 선택으로 세상에 나온 게 아닙니다. 좌파든 우파든 아이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면 아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문제는 ‘행복’이라는 게 대체 뭔가라는 것이겠죠.
“나 선배의 교육관 존경해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아이가 희생되면 안 되잖아요?” 딸이 중학교 3학년일 때, 학원 같은 데 하나도 안 다니는 걸 두고 한 후배가 한 이야기였습니다. 여럿이 함께한 자리였고 그도 술이 좀 된 상태라 씩 웃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딸에게 누구의 말인지는 밝히지 않고 그 이야기를 했더니 단박에 그러더군요. “아빠가 학원에 안 보낸 게 아니고 내가 안 간 건데?” 희생이니 뭐니 갈 것도 없이 싱겁게 대화가 끝난 거죠.
후배는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고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즈음 촛불시위에도 내내 개근했고 이명박이라면 아주 이를 갈곤 했죠. 그 자리에서는 넘어갔지만 ‘희생’이라는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80년대 운동권 생각이 났습니다. 그 시절 운동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그런 거였던 것 같습니다. ‘고통 받는 민중을 위해 날 희생한다.’ 그런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대학생들이 현장에 투신했죠. 그러나 그런 생각에는 정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른이 넘고, 결혼해 아이도 생기고, 먹고사는 문제에 부딪히면 그런 생각으로 운동을 지속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죠.
학원에서 자율학습 하는 학생들 | 연합뉴스
“나는 좋지만 나머지 99명은 어떡하라고”
그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운동을 지속하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 그들의 헌신이나 지사적 태도를 상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그들의 운동을 하는 이유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남을 위해 제 삶을 희생하거나 불행을 감수하기보다는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게 제일 행복한 삶이라서 운동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후배처럼 대놓고 말하지는 않더라도 종종 만나곤 합니다. 저 사람은 좌파 중에서도 좀 근본주의적인 사람이니까 아이 교육도 타협 없이 제 신념을 관철시키는 거려니 하는 시각이죠. 한마디로 천부당만부당한 말입니다. 제가 그리 신념에 찬 좌파에 속하는 사람도 아니거니와, 제 세계관이나 신념을 아이에게 들씌우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입니다. 더구나 그걸 위해 아이가 덜 행복해도 좋다고 생각한다면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이지요. 아이는 자기 선택으로 세상에 나온 게 아닙니다. 좌파든 우파든 아이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면 아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문제는 ‘행복’이라는 게 대체 뭔가라는 것이겠죠.
행복이란 뭘까요? 이 문제에 대해 나중에 좀 더 계통 있게 이야기할 생각입니다만, 언젠가 본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떠오릅니다. 제주도의 해녀들이 나오는 다큐였습니다. 옛날에는 ‘해녀 아가씨’가 나오는 영화와 노래도 있었는데 이제 제주도의 해녀는 젊은 축이라고 해봐야 40대라고 합니다. 물질을 하다 쉬고 있는 해녀들 중에서도 연세가 가장 많은 할머니와의 대화 장면이었습니다. “스쿠버 장비를 사용하면 더 많은 수확을 하실 텐데요?” “그걸로 하면 한 사람이 100명 하는 일을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안 하세요?” “그렇게 하면 나는 좋지만, 나머지 99명은 어떻게 살라고?”
마지막 대사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옛날 사람들은 다 공동체주의자이고 이타적이기만 했던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인텔리들의 관념 속에 그려진 상일 뿐, 성인이 아니고서야 더 좋은 옷 입고 좋은 음식 먹고 더 풍요롭게 살고 싶은 욕구가 아예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중요한 건 그런 욕구가 발현되는 방식, 내 욕구가 다른 사람들의 욕구와 조화를 이루는 방식이죠. 할머니는 자신의 욕구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욕구로 제 욕구를 견제합니다.
그 할머니가 무슨 운동가이거나 하는 특별한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제 몸 부지런히 움직여서 식구들 건사하며 평생을 살아온 평범한 한국의 할머니 중 한 분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할머니의 생각 역시 전혀 특별한 게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불과 30여년 전만 해도 시골은 말할 것도 없고 도시에서도 유별난 부자나 지배계급에 속하는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의 평범한 생각이었을 뿐입니다. 물론 그 시절에도 남보다 앞서는 걸 좋아하고 요즘 말로 ‘대박’이 나고 ‘뜨고’ 하는 것에 혈안이 된 사람도 있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매우 적었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신자유주의 20년 대다수 행복관 깨져
세상이 그나마 사람 사는 세상의 꼴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어떤 흉악한 세상에서도, 어떤 악랄하고 탐욕스럽고 막돼먹은 놈들이 세상을 지배할 때에도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다수의 생각이 유지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다는 것, 아무리 많이 가지고 아무리 앞서도,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염려하는 사람이 없다면, 나와 진심으로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는 것을 대다수가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이젠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생각이 되었습니다. 20여년 동안 그놈의 신자유주의 바람에 평범한 대다수의 행복관은 박살이 나고 있는지 알아챌 겨를도 없이 박살이 났습니다. 경쟁력이 행복을 가져온다는, 남보다 많이 가질수록 남보다 앞설수록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더 이상 한 줌 지배계급의 생각이 아닙니다. 대다수 노동자의 생각이며 대다수 농민의 생각이며 대다수 서민들의 생각입니다. ‘대박’이 나고 ‘뜨고’에 혈안이 되는 것을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 삶이 아니라 내 새끼의 삶이라고 생각하면 그런 생각은 몇 배로 강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이 아수라장이 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명박이라면 이를 갈던 후배가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것도 그의 행복관이 저도 모르게 달라졌기 때문일 겁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상당 부분 맞는 말이고 저 역시 동의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박근혜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기 전에 이미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행복관을 잊었다는 사실입니다. 보수와 진보가 교육에서는 다를 게 없다는 이야기도 결국 보수와 진보의 행복관이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보수는 제 행복관에 의거하여 최선을 다해 아이를 키우는데, 진보는 보수의 행복관을 꾸어다가 뭔가 이중적인 기준으로 아이를 키운다고나 할까요. 옳은가 그른가를 논하기 전에 그런 병든 교육이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기는 어려울 겁니다.
부모들이 그런 상태에 이른 건 거대한 사회 변화의 결과이며 낱개 부모가 그런 거대한 사회 변화를 거스르거나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양한 고민과 노력과 연대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기억하는 부모가 그 모든 시도와 변화의 출발점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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