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임금 안 올라 일하는 시간 많아 피곤”

한국고용정보원 권태희 박사, ‘시간빈곤층’ 연구

한때 ‘저녁이 있는 삶’이란 구호가 유행했다. 여유로운 삶이 행복의 척도라는 것이다. 행복의 양을 측정할 수 있을까? 한국고용정보원의 권태희 박사는 미국 레비경제학연구소가 만든 림팁(LIMTIP) 모델을 한국에 적용시켜 시간 부족에 시달리는 비율을 밝혀냈다. 여유롭지 못한 삶을 사는 비율이라고 볼 수도 있다.

림팁 모델은 기존의 소득 빈곤 개념에 시간 빈곤 개념을 포함해 빈곤층을 재구성하는 모델이다. 누구나 일주일은 168시간이다. 2009년 한국시간사용조사 통계에 따르면 수면·식사 등 개인적인 관리 시간과 개인 여가활동을 합치면 개인당 평균 90시간을 사용한다. 여기에 유급 노동시간과 가사노동 시간을 뺐을 때, 168시간을 넘어가는 계층이 바로 시간 빈곤층이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 않더라도 시간 빈곤층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가사노동에 돈을 많이 지불하고 있거나 여유롭지 못한 삶을 산다고 볼 수 있다.

맞벌이 가구는 공식 통계에서의 소득 빈곤율이 1.9%로 다른 계층보다 낮게 나타난다. 하지만 림팁 모델상 맞벌이 가구의 빈곤층은 7.5%로 4배 가까이 늘어났다. 시간 빈곤을 감안했을 경우 맞벌이 가구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공식 빈곤층보다 3배 많은 가구가 빈곤층으로 분류됐다.

권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보육에 대한 지원이 시간 빈곤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방안 중 하나로 나타났다. 또한 가사노동의 상당수를 책임지는 여성들에게 질 좋은 일자리가 제공되는 것 역시 시간 빈곤을 줄일 수 있는 해법이다. 권 박사에게 직접 이번 연구의 의의를 물었다.

한국고용정보원 권태희 박사 | 권태희 제공

어떻게 이런 연구를 하게 됐나.
“한국인들은 정말 시간이 없다. 태어나서부터 가장 중요한 것이 시간이고, 시간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다. 이번에 ‘시간 빈곤’이란 용어를 사용했을 뿐이지 시간의 중요성이 최근 조금씩 강조돼 왔다. 몇 해 전부터 언론에서 개인의 시간 부족을 다루는 기사들이 나왔다. 기업 광고에서도 개인 시간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맞벌이 가정에 숨겨진 빈곤층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기본적으로 취업자가 시간 빈곤에 더 시달린다. 돈이 없기 때문에 맞벌이를 하는데, 아이가 있는 기혼여성의 경우 대부분 시간제 일자리로 진입한다. 가사노동할 시간은 부족한데, 벌어오는 돈이 적으니 부족한 가사노동을 대체하기도 어렵다.”

여성들의 취업률 자체도 40%대로 남성에 비해 한참 낮다. 정부에서는 고용률 70%를 달성하기 위해 여성 시간제 일자리를 늘리겠다고 하는데.
“현재 시간제 일자리 제도도 문제가 있다. 애초 시간제 일자리는 단기적으로 여성 고용률을 높이기 위해 도입한 것이고, 당연히 일자리의 품질은 담보될 수 없다. 그런데 정부에서 정규직에 준하는 보장을 한다고 하니 경력 단절된 여성들이 경쟁적으로 몰리고 있다. 일자리를 늘리려면 (시간제 일자리보다는) 기존의 일자리를 늘리는 식으로 가야 한다.”

여성이 주로 담당하는 가사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측정해야 제대로 된 일자리 정책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개인적으로 가사노동 가치를 추계하는 것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이를 키우고, 가르치고, 어르신을 돌보는 행위가 사회적으로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가계위성계정이라는 이름으로 가사노동의 가치를 계산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10여년 전 논의가 있었지만 현재까지 여성 관련 정책에 전혀 반영이 안 되고 있다.”

특히 이번 연구에서 시간 빈곤을 효과적으로 줄여주는 것이 바로 보육 지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보육 부분에 방점을 찍고 연구를 했다. 보육에 대한 지원은 출산율과도 연결이 되어 있고, 여성의 취업률 등 모든 것과 연관이 되어 있다. 그래도 무상보육이 도입되고 임신한 여성 노동자에 대한 보장이 강화되는 등 약간은 나아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본다. 우리 사회가 맘 놓고 차세대가 자녀를 낳고 기를 수 있게 기초적인 정책적 방향을 잡아야 한다.”

한국 사회가 시간 빈곤에 시달리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가 피로한 것은 임금이 잘 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에서 임금을 올리는 대신 연봉제나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대체로 기본급 70%, 인센티브 30%로 운영되고 있다. 인센티브를 충분히 받지 못한 경우는 저축을 빼서 쓰거나 대출을 하거나, 몸으로 때워야 한다. 주말을 반납하고 일을 하고, 부업을 뛰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고 과로하는 것이다.”

장시간 일하는 한이 있더라도 연봉을 많이 받겠다는 인식이 일반적인데.
“선진국은 개인이 은퇴 등의 이유로 노동시장 바깥에 있을 때 삶에 들어가는 비용의 절반 이상을 사회가 부담한다. 우리는 사회가 부담하는 게 과연 얼마나 될까. 많아야 20~30%에 불과하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돈이 있거나 한 경우가 아니라면, 노동시장 안에 있을 때 나중을 대비해서 남들 놀 때 일해야 한다. 개인이 행복해야 조직이 행복하고, 사회에 행복이 넘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소위 ‘갑’들만 행복한 사회인 거 같다.”

시간 빈곤을 줄일 방안으로 ‘유연한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어떤 의미인가.
“이를테면 스웨덴의 경우 근로시간에 대한 인정 범위가 출근을 시작하는 시점부터 시작된다. 나 같은 경우도 통근시간이 길어서 아침 6시30분에는 집을 나서야 한다. 하지만 출근시간은 일하는 시간으로 고려가 안 되기 때문에 저녁 6시까지 일을 하고 집에 가면 밤 8시30분이 훌쩍 넘는다.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본적인 환경 자체가 안 되는 거다. 특히 한국처럼 교통전쟁이 심각한 나라에서 과연 모든 직종에서 아침 9시 출근, 저녁 6시 퇴근을 고집해야 하는지 고민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이번 연구를 진행하면서 느낀 점은.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세상을 볼 때 기존 경제학으로는 볼 수 없는 우리의 삶의 방식이 보인다. 한국인들의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 이하일 때보다 지금이 수치상으로는 살기 좋아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행복의 수준도 과연 높아졌을까. 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불행하다는 조사 결과가 때만 되면 발표되고 있다. 이런 현상의 본질을 찾다 보면 시간을 잘 사용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는 거다. 시간 빈곤 논의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의미가 바로 소통이다. 일하는 시간에만 일하고 개인 시간을 충분히 즐기는 국가들과 우리의 차이가 바로 소통문화다. 정해진 근무시간에만 일을 하고 쉴 수 있다면 동료들과도 충분한 소통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뜻이 맞는 사람들과 취미생활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안 되는 게 현실이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