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와인 혹은 와인을 둘러싼 문화적 성질이 ‘중산층의 욕망’과 잇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중산층은 어떤 식으로든 문화적 차이를 통해 신분적 차별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렇다고 ‘먹고 살 만하니까 와인을 찾는다’고 싸늘하게만 봐서는 곤란하다. 소주나 맥주로는 자기만의 내밀한 취향을 만들기 어렵다. 그런데 와인은 다르다.
“화려하고 중후하고, 그러면서 로맨틱한 선율.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제2번. 라흐마니노프가 태어난 러시아의 깊은 숲. 그 가혹한 기후를 살아내는 사람들의 강한 생명력을 찬양하는 듯한 웅대하고 신비한, 몇 겹으로 얽혀 있는 현과 관의 울림처럼 아로마와 맛이 혀 위에 겹겹이 쌓여서 긴 여운으로….”
이게 무슨 소리인가. 러시아 문학의 대가가 현지를 방문하여 쓴 문학 기행문인가, 아니면 볼셰비키 시절에 망명을 하여 브룩클린 빈민가에서 쓸쓸히 살다간 러시아 망명객의 일기인가? 와인 좋아하시는 독자라면 금세 눈치챘을 것이다. ‘샤토 라루르 2002년 산’에 관한 묘사, 즉 인기 절정의 연재만화 <신의 물방울>에 나오는 대사다.
그 <신의 물방울>의 연재가 지난 6월 일본 현지에서 막을 내렸다. 12개의 최고 와인과 ‘신의 물방울’로 불리는 극강의 와인 하나를 찾아내기 위한 라이벌 캐릭터 대결 양식의 이 만화는 일본은 물론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를 했고, 국내에서도 오랫동안 인기를 끌었다. 단행본으로 일본에서만 500만부, 세계적으로 1000만부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서울의 한 모델하우스에 비치된 와인 | 정윤수
탐미할 사람과 흉내내 본 사람 나뉘어
이 만화 때문만은 아니지만, 이 만화에 의하여 국내에서도 10년 가까이 와인 열풍이 지속되었다. 10년 전쯤에는 30대 부부들이 호기심을 일으킬 만한 수준의 가격으로 선풍을 일으킨 ‘보졸레 누보’가 있었다. ‘보졸레 누보 현상’이라고까지 부를 정도였다. 이 신드롬을 고비로 하여 계속 와인을 탐미할 사람과 그저 남들 마시니까 나도 한 번 하고 거들어본 사람들이 나누어졌다. 그 후 와인은 음주문화 이상의 사회적 현상으로 폭발했다. 기업 경영자를 위한 와인 특강은 물론이고 몇몇 대학에서도 와인경영학을 개설한 적이 있으며, 크고 작은 도시의 웬만한 요처마다 와인가게가 들어서고 와인카페가 문을 열었다.
2007년도의 연간 수입량은 3215만ℓ까지 치솟았다. 2008년 금융위기 때문에 잠깐 시들해지는가 싶었지만 실은 거품이 제거되는 과정이었다. 자유무역협정(FTA)의 진행에 따라 초기에는 칠레산 와인이, 2010년 이후에는 ‘한·EU FTA’ 효과로 와인의 본산지라고 하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와인이, 2012년 한·미 FTA 이후에는 캘리포니아산 와인까지 저렴한 가격에 밀려들어왔다.
가난했던 시절에는 햅쌀이나 계란이 최고 선물이었는데 70년대의 비누와 치약 세트, 80년대의 갈비와 정육 세트, 90년대의 건강식품과 백화점 상품권 등에 이어 지금은 와인을 명절 선물로 분주하게 주고받고 있다. 그래서 와인문화 초기에는 그 종류와 마시는 법을 꼼꼼히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 있었으나 이제는 “철저하게 와인에 파고들어 마시는 것도 하나의 길이지만, 와인이란 원래 가볍게 마개를 퐁! 따서 친구와 맛있는 밥을 먹으면서 즐기는”(<신의 물방울> 대사) 일상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럼에도 이 문화가 아직 이질적인 것도 사실이다. ‘스테이크 또는 치즈+와인’보다 ‘삼겹살+소주’ 혹은 ‘맥주+치킨’이 아직은 대세다. 이것은 술의 종류와 성질에 따른 분류이기도 하지만 대여섯 명이 둘러앉아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할 때, 와인과 나머지 술들은 그 대화의 분위기를 달리 형성한다. 그래서 꽤 많은 동호인들의 이견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와인 혹은 와인을 둘러싼 문화적 성질이 ‘중산층의 욕망’과 잇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설명될 수 있다. 그 하나는, 기본적인 생계나 주거문제, 아이들 교육비와 노후대책 정도는 어느 정도 해결한 중산층 계층에 와인이 흡착한다는 점이다. 와인의 맛과 향의 순도에 집중하는 순수한 동호인들로서는 섭섭하겠지만, 이 계층은 어떤 식으로든 문화적 차이를 통해 신분적 차별을 드러내고자 한다. 전통사회의 양반처럼 옷차림이나 걸음걸이로는 구별되지 않는 시대이므로 큰 배기량의 자동차, 근사한 휴양지의 회원권, 그리고 양질의 와인은 자신의 신분과 사회적 관계를 구성하는 아이템으로 선택된다.
서울의 한 모델하우스에 비치된 와인 | 정윤수
유럽문화에 대한 과도한 몰입도
그러나 한 가지 더 추가해야 한다. ‘먹고 살 만하니까 와인을 찾는다’고 싸늘하게만 봐서는 곤란하다. 이 살인적인 경쟁사회에서 주거·교육·노후대책 같은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다고 하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성공가도에 올라섰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내면은 어떠한가? 자기만의 세계는 갖고 있는가? 신분적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할리우드 액션이 아니라 진실로 자기만이 추구하는 어떤 사회적 가치와 문화적 취향의 독자성이 있는가? 쉽지 않다. 만약 이 중산층이 기존의 주류 질서가 요구하는 사회적 가치 대신 다른 가치를 추구하고자 한다면 이제까지 이룩해온 경제적·사회적 자산을 어느 정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문화적 취향이 남는다. 문화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을 통해 자신의 독특한 취향을 찾아내고 그에 대한 과감한 취향 소비를 통해 자기만의 내적 세계를 구축해내는 것이 남는다. 그 종류로 독서도 있고 여행도 있는데, 여기에 와인이 결착한다. 그 품종이 제한되어 있고 그 맛의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는 소주나 맥주로는 자기만의 내밀한 취향세계를 만들기 어렵다. 그런데 와인은 다르다. 인구 수만큼이나 수많은 종의 와인이 있다. 그 중 하나에 심미적으로 몰입하고자 하는 욕망, 이를 중산층의 문화적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에 유럽 문화에 대한 과도한 몰입, 일종의 거꾸로 선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문화적 선망까지 결합하게 되면 <신의 물방울> 대사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언어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싱싱한 잎을 드리우고 짐승들이 장난치는 숲. 이 길은 어디로 이어져 있을까. 나무들 너머로 뭔가가 보인다. 성이다. 하얀 성. 거대한 성이 숲 저편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노이슈반슈타인 성. 예술을 사랑한 루트비히 2세가 17년에 걸쳐 지은 꿈의 세계.”
나는 몇 해 전에는 경기도의 어느 모델하우스에 비치된 와인셀러를 보며 생각했고, 또 지난 여름에 서울의 어느 모델하우스에 들렀다가 근사하게 구비된 식탁, 그 위에 놓인 와인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문화평론가>
![[오늘을 생각한다]](http://img.khan.co.kr/spko/ranking/weekly/140098/20240417112812_14009801.jpg)
‘만성 숙취’ 해소 될까?
“민심은 옳다…나부터 반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