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지식협동조합’ 대안대학 될까

학위나 전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가르치고 배워

지난 4월 4일 서울시내 골목 한편에 자리잡은 모 사회복지관 강의실. 목소리를 높인 강사의 강의가 한창이다. 겉으로 봐선 평범한 시민강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강좌가 ‘대학’의 강의라는 것이다. 하지만 보통의 대학 강의와도 다르다. 학위나 전공을 따려는 수업이 아니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지식의 순환’에 목표를 두는 것이 이채롭다. 그래서인지 강의실의 열기는 더 뜨겁게 느껴진다.

이날 강의의 제목은 ‘보편종교성과 인류의 미래.’ 강의를 맡은 박규현 강사는 학위를 가지고 대학에 적을 둔 연구자는 아니다. 전문적인 연구자라기보다는 ‘평범한’ 시민에 가까운 협동조합의 활동가다. 강의를 경청하던 수강생들은 자유롭게 의문을 제기하고 강사나 다른 수강생이 이에 대답하거나 새로운 의견을 덧붙인다. 두 시간으로 계획된 강의지만 딱히 마치는 시간에 구애받지도 않는다.

최초의 협동조합형 대안대학을 표방하는 ‘지식순환협동조합’(지순협)의 강의는 이름처럼 강사와 수강생 간의 지식과 의견이 순환하는 장이다. 여느 대학 캠퍼스가 아니라 동네 사회복지관에서 열린다는 점도 이 ‘대학’과 평범한 시민들의 거리를 보여준다.

지식순환협동조합 조합원들이 대안대학 강좌에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식순환협동조합 제공

“보통 사람들의 일상과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서 학문 연구와 지식 전달이 가능하길 바라는 기대를 갖고 강좌에 참여하게 됐다.” 수강생 김우혁씨(34)는 보통의 대학 강의처럼 전공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 걸 장점으로 꼽았다. 자유롭게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강의 방식 덕에 관련 전공자가 아닌 시민도 쉽게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적인 욕구 때문에 인문학 쪽으로 대학원 석사과정을 밟았어요. 하지만 현실은 다르더군요. 전공에 국한된 강의에다 경직된 교수사회와 조직…. 결국 배우고 싶었던 건 전혀 배우지도 못하고 그만뒀습니다.”

김씨는 대안대학이 일반 대학들이 채우지 못하는 틈새를 메우는 역할을 해주길 기대했다.

대학 캠퍼스가 아닌 동네 복지관서 강의
지순협의 대안대학은 대학을 표방했지만 현재로선 정규 대학처럼 이수학점을 인정받거나 학위를 취득하는 등의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아직까지는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되는 일종의 지식·연구공동체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프랑스의 파리8대학처럼 교육당국으로부터 교과과정을 인정받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다. ‘68혁명’의 급진적 분위기 속에서 이름 그대로 ‘실험대학’으로 태어난 파리8대학(당시 뱅센대학)은 대표적인 협동조합형 대안대학이었다. 현재는 프랑스 교육당국이 정식 학위를 인정하는 교육기관이지만, 아직도 학위에 관계없이 강좌를 열 수 있는 등 개방적인 학풍이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순협 교과위원장인 이명원 경희대 교수는 “미셸 푸코와 질 들뢰즈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처음 대안대학 설립에 나설 당시에도 ‘실험’에 그칠 거란 생각이 팽배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탄탄하게 운영되고 있는 점을 보면 협동조합의 형태로 시작한 시도가 성공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대안대학’을 지향한 움직임 자체는 학계 내에서 이전부터 가끔씩 있어 왔다. 하지만 협동조합 방식으로 조직 형태를 갖춘 것은 지순협이 처음이다. 지순협은 지식이 순환하려면 마땅히 함께 돈도 순환해야 하고, 그러려면 안정된 조직과 자금이 필요하다는 데 착안했다. ‘대안’을 연구하는 연구자들마저 그들이 ‘보따리 장사’ 시간강사인 이상 쥐꼬리만한 강의료와 연구비라도 나오는 대학 외엔 기댈 곳이 없는 게 현실이다. 지식의 생산과 소비가 분리된 현재의 대학에 대안을 제시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간 지식 거래와 순환을 돕는다는 구상, 협동조합은 여기에 꼭 필요한 요건이었다.

“지식이라는 건 그걸 전수받은 소비자도 얼마든지 새로운 지식의 생산자가 되어 지식의 순환에 참여할 수 있다. 지금의 대학이나 연구기관에 가장 부족한 게 바로 이 ‘지식의 순환’인데, 협동조합으로 그 점을 보완할 수 있다.” 이 위원장은 지식의 생산과 소비가 조합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소비자 조합원이 단순히 소비자로서 수강생에 머물러 있지 않고 생산자로 위치를 바꿀 수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소비자 조합원들은 스스로 전공을 창작해 만들어나갈 수도 있고, 직접 원하는 주제의 강의 개설을 진행할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생산자 조합원들은 조합원들의 조합비와 수강료를 지원받아 보통의 대학 강사료의 두 배에 해당하는 시간당 15만원의 강사료를 보장받는다. 안정적인 연구를 보장하는 동시에 새로운 강의를 개발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다.

지순협이 대안대학 설립과정의 일환으로 진행 중인 이번 첫 번째 정규 대중강좌는 올 9월부터 시작되는 2년제 정규과정을 위한 일종의 예비과정이다. 2년 정규과정에서는 총 8학기가 운영되고, ‘사회인문학’, ‘인지생태학’, ‘문화기획 및 실천’ 등 학제와 전공이 융합된 강의들을 조합원에게 제공한다.

현 대학의 부족한 ‘지식의 순환’ 강조
학술·지식분야에서 협동조합 형태의 조직을 도입하는 사례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이제이 생활역사협동조합’(이이제이)은 협동조합기본법 시행 이후 설립된 각종 협동조합 중에서도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조합이다. 지난해 7월 설립 이후 꾸준히 늘어난 조합원은 3월 말 기준으로 1200명을 넘어섰다. 여러 분과 중 ‘역사’에만 특정해 대중적인 강좌나 답사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은 물론, 팟캐스트를 통해 전파력을 높인 것이 성공의 요인이다.

“사실 맘 먹고 책 한 권 읽으려고 해도 눈에 들어오지가 않아 몇 달이 가도록 한 권 다 읽기가 힘든데, 한 달에 1만원 정도의 조합비를 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접할 수 있다는 게 조합의 매력이다.” 이이제이의 조합원 강수영씨(28)는 조합이 제공하는 프로그램이 조합원들 간의 소통을 유도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만족감이 높다고 평했다. 또 다른 조합원인 안윤영씨(32)도 “그냥 강의 듣고 유익하다거나 재미있다거나 하고 넘어가지 않고, 오프라인에서 만난 조합원들끼리 전문가를 모시는 자리를 만들면 더 세세한 부분까지 알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협동조합이 개인 차원에서는 어려운 지적 활동을 쉽게 해준다고 말했다.

정책 싱크탱크와 같은 보다 전문적인 연구영역에서 협동조합 방식이 도입되기도 한다. 정책 의제를 개발하고 제시하는 사업에 들어가는 적지않은 기간과 비용을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협동조합 형태로 충당하는 것이다.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는 특히 대부분의 조합원이 대학 및 연구기관의 정책 관련 연구자라는 점에서 전문성을 갖춘 활동까지 보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좋은나라 원장인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 교수는 “전문연구조합원은 기존 조합원의 추천을 받아 가입하기 때문에 연구수준을 보장할 수 있다”며 “협동조합으로 운영되면 개별 연구자 차원에서는 하기 힘들었던 큰 단위의 정책 관련 프로젝트들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조합 전체로나 조합원 개인으로나 이익을 공유하게 돼 더 유리하다”고 밝혔다.

각종 연구보고서와 이슈페이퍼 작성에 참여하는 전문연구조합원뿐만 아니라 일반 지식공유조합원들도 조합의 논의 및 기획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의사결정기구가 개방돼 있다는 점도 특색이다. 좋은나라의 활동 중 가장 대표적인 활동인 월례 정책포럼에서도 조합 내외의 관련 연구진뿐만 아니라 일반 조합원들도 정책에 관한 제안을 펼 수 있게 돼 있는 것이다. 유 원장은 “정책 연구가 단지 정부나 기업에서 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시민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기 때문에 시민과 공동체를 위한 내용이 조합 활동의 근간에 자리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