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긴급조치 재심’ 긴급조치를 단죄하다

피해자들에게 무죄 선고 잇따라… ‘9호 위반’ 당시 대학생 200여명도 재심 기다려

“오늘 이 자리는 피고인 개인에게 유신시대의 기소 내용이 무죄라는 것을 밝히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피고인에게 유죄판결을 선고한 유신시대가 폭압적인 야만의 시대였음과 아울러 그 야만의 시대가 종언을 고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재판부로서는 과거에 선배 판사들이 피고인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사실에 대해 그들을 대신하여 사과하고, 민주주의를 향한 피고인들의 열정과 헌신적인 노력에 무한한 경의와 찬사를 표한다.”

지난 8월 31일 서울북부지법에서 열린 ‘긴급조치 9호 재심’ 재판정에서 재판장이 읽은 판결문 중 일부다. 김형국씨(74)는 전화통화에서 “34년 만에 무죄를 확정하는 김재환 부장판사(형사11부)의 판결문을 들으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13일 헌법재판소가 박정희 정권 당시 유신헌법 긴급조치 조항의 위헌 여부를 가리는 공개변론을 하고 있다. 대법원은 2010년 12월 긴급조치를 명령·규칙의 일종으로 보고 위헌 결정을 내렸다. | 박민규 기자

김씨는 1978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돼 실형을 살았다. 1975년 5월 13일 발동된 긴급조치 9호는 이전의 긴급조치들의 ‘종합판’으로, 유신헌법에 대한 비방, 개정 또는 폐지 주장을 금지했으며 이를 어길 경우 영장 없이 체포·구금할 수 있도록 했다.

김씨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것은 1978년 5월의 일이다. 그는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1973년부터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김대중은 1976년 3월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했다가 5년형을 받고 수감됐다. 1977년 12월에 진주교도소에서 서울대병원 201호실로 ‘이감’됐다. 창문을 폐쇄해 빛이 들어오지 않는 병실을 20여명이 감시했다. 면회는 하루 한 번 허용됐다. 김씨는 이 시절 점심을 준비해 문병하는 이희호 여사를 수행했다. 김씨는 1978년 5월에 한국 민주화를 지원하던 외국인 교수의 서울대병원 방문을 주선했다가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당시 검찰은 그가 광화문에서 열린 유신헌법 철폐 학생집회 내용을 야당(통일당) 인사들에게 말했다는 이유로 그를 기소했다. 김씨는 지난 8월 31일 재심을 통해 34년 만에 무죄를 인정받은 것이다.

같은 날 김씨 이외에 3명이 더 긴급조치 9호 위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김씨 등 4명은 지난해 4월 재심을 청구했다. 2010년 12월 대법원이 긴급조치 전반에 대해 위헌을 선고한 것이 계기가 됐다. 대법원의 위헌 선고 직후 긴급조치 9호 피해자들은 ‘재심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법무법인 덕수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을 통해 소송을 준비해왔는데, 8월 31일 북부지법 재판은 긴급조치 9호 피해자들에 대한 첫 재심선고였다.

“34년 만에 무죄 확정, 감격의 눈물”
최근 긴급조치 위반사건에 대한 재판에서는 잇따라 무죄선고가 나오고 있다. 지난 8월 26일에는 긴급조치 4호 위반사건에 대해 서울고등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 6일에는 긴급조치 1호 위반사건에서도 무죄판결이 나왔다. 다른 긴급조치 위반사건들에 대해서도 재심이 진행 중이다.

대법원이 긴급조치 전반에 대해 위헌을 선고했기 때문에 긴급조치사건 관련자들은 재심만 청구하면 무죄를 받을 수 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07년 자료를 보면, 1974년 이후 발동된 긴급조치 1·3·4·9호 사건 피해자들은 1140명(589건)이다. 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긴급조치 9호 피해자들이다. 1·4호 피해자들은 155명(36건), 3호 피해자들은 11명(9건)인데, 9호 피해자들은 976명(544건)에 이른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 강삼재 전 한나라당 의원 등도 모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유죄를 받았다.

1975년 4월 10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앞에서 시민들이 긴급조치 7호 선포를 알리는 대자보를 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

‘긴급조치 9호 관련자 재심대책위’ 양민호 위원장에 따르면 현재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유죄를 받았던 당시 대학생들 200여명이 재심을 기다리고 있다. 신명식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이사(55)도 그 중 한 명이다. 1978년 당시 경희대 사학과 3학년이던 그는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하는 교내 시위를 하다 구속됐다. 징역 1년을 선고받고 10개월을 복역했다. 그는 최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유신 및 인혁당 관련 발언을 비판했다. 신 기획이사는 “아버지에 대해 효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1970년대의 판단 기준으로 한국 사회를 이끌어가려고 하는 것은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박근혜 후보에 대해 ‘유신의 2인자’라는 표현을 썼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1976년 경희대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오전에 갑자기 ‘오늘 오후 수업을 모두 휴강하니 학생들은 모두 집에 돌아가라’는 학내 방송이 나왔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날 박근혜씨가 참석하는 행사를 학교 강당에서 열기로 되어 있었다. 학교에선 아마 학생들의 항의시위를 차단하려고 그랬던 것 같다. 오후에 한 학생이 문리대 앞에서 ‘대통령 딸이 온다고 학교 문을 닫는 대학이 어디 있느냐’며 소리를 질렀다. 박근혜씨는 그저 대통령의 딸이기만 했던 게 아니라 유신체제의 2인자였다고 생각한다.”

“구태 못버린 검찰의 항소 유감”
다른 긴급조치 피해자들도 박근혜 후보의 역사관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김형국씨와 함께 재심에서 긴급조치 9호 사건 무죄를 선고받은 정상시씨(57)는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두 개의 판결이 있다”는 박근혜 후보의 말에 대해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다. 인간적으로는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대통령에 출마하는 사람이 역사를 부인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1977년 4월 한국신학대학교 교내시위에 참여했다가 구속돼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긴급조치 피해자들의 재심 소송은 줄을 이을 것으로 보이지만 법원이 재심을 언제 개시할지는 불분명하다. 긴급조치 위반에 대한 재심 개시는 각 법원이 자체적으로 판단할 사항이기 때문이다. 양민호 위원장은 “헌법재판소에서 위헌결정이 나와야 신속하게 개시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10월 긴급조치사건 위헌소원에 대한 공개변론을 열었으나 아직까지 뚜렷한 결정이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긴급조치 9호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이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일이 생겼다. 검찰이 재심판결에 대해 항소했기 때문이다. 김형국씨는 “법원으로부터 검찰이 항소했다는 통보를 받았는데, 검찰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양민호 위원장은 “항소할 명분이 없는데 매우 유감이다. 검찰이 구태를 못 버린 것 같다”고 비판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