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박원순 변호사 손배소 사건’ 전말

<위클리 경향>에 ‘국정원 사찰’ 첫 폭로

국정원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당한 희망제작소 박원순 상임이사가 지난 17일 서울 평창동 희망제작소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 이사는 이 자리에서 “권력은 짧고 진실은 길다”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원고 대한민국(법률상 대표자 법무부 장관 김경한), 피고 박원순.
국가정보원이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인 박원순 변호사에게 2억원의 명예훼손소송을 제기한 소장의 원고와 피고명이다. 박 이사는 9월17일 서울 평창동 희망제작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명예훼손을 이유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고 세계적으로도 선례가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명예훼손소송은 지난 6월23일자 <Weekly 경향> 830호에 실린 인터뷰 기사 ‘이종탁이 만난 사람’으로 촉발됐다. 이 내용은 소장에도 실려 있다. 이 소장의 청구 원인에는 ‘피고 박원순은 충분한 확인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2009. 6. 23. 위클리 경향 출판국 기획위원 이종탁과의 인터뷰를 하면서’라고 나타나 있다.

이 인터뷰는 6월10일 오전 희망제작소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당시 박 이사는 이명박 정부의 국정 쇄신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한 직후 이종탁 출판국 기획위원과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는 한동안 현실정치에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순수한 시민단체 활동으로 돌아갔던 박 이사가 시국선언에 앞장서게 된 이유에서 시작됐다. 청와대에 대해 언급하면서 박 이사는 시민단체 문제를 제기했다. 사회가 잘 되려면 시민단체가 중간 전달을 해야 하는데 이 정부에서는 시민단체를 무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말을 하면서 박 이사는 배제의 정치를 총체적으로 지휘하는 사령부가 있다고 본다면서 국정원 문제를 끄집어냈다. 시민단체와 관계를 맺는 기업의 임원들까지 조사해 연락하는 통에 많은 단체가 재정적으로 힘겨운 상태라고 밝힌 것이다.

본지와의 인터뷰서 국정원 문제 거론
국정원이 소장에서 문제를 지적한 인터뷰 기사는 다음 부분이다.
“우리 희망제작소만 해도 지역홍보센터 만드는 사업을 3년에 걸쳐 하기로 행정안전부와 계약했어요. 그런데 1년 만에 해약통보를 받았습니다. 하나은행과는 마이크로 크레딧 같은 소기업 후원사업을 같이 하기로 합의하고 기자회견까지 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무산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국정원에서 개입했다고 합니다.”

이 기사가 실린 <Weekly 경향>은 6월15일 월요일에 배포됐다. 네티즌들이 이 기사를 접한 것은 목요일인 6월18일 오후 2시쯤이다. 이 기사는 인터넷 언론인 프레시안이 이날 오후 4시쯤 기사를 받아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프레시안의 기사는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변호사)가 이명박 정부에서 국정원을 통한 민간사찰을 하고 있다고 폭로해 파문이 예상된다’로 시작됐다. <Weekly 경향>에 실린 인터뷰에서 국정원 개입설을 주장했다는 내용이었다.

각 정당에서도 논평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민주당 김유정 당시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이제는 정권 차원에서 국민도 시민단체도 정치권도 모두 낱낱이 감시하고 입을 틀어막겠다는 것”이라면서 “이것이야말로 독재가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비판했다. 민주노동당 우위영 대변인은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이명박 정권이 국정원을 통한 민간사찰을 하고 있다고 폭로했다”면서 “정권의 공안기구를 자임하고 초법적인 권한을 휘두르며 시민단체를 고사시켜 정권의 안위를 위해 몸 바치고 있는 국정원은 지금 즉시 불법사찰을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고 주장했다. 진보신당 김종철 대변인은 “국정원이 박원순 이사의 폭로에 대해 명확히 해명하지 못하면 국정원은 스스로 민간사찰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Weekly 경향> 보도에 대한 입장 발표

국가정보원이 박원순 변호사를 상대로 낸 소장. 원고에 ‘대한민국’이 명시돼 있다.

이날 국정원의 반응은 담담했다. 국정원 관계자는 “확인해 봤으나 그런 내용은 없다”면서 “국정원에서 민간인을 사찰하고, 민간단체의 활동에 대해 협박을 가한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이라고 말했다. 경향신문도 6월19일자에 이 사실을 보도했고, 다른 일간지와 인터넷 언론에서도 이 점을 중점있게 보도했다.

사태가 일파만파로 커지자 이날 국정원은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제목은 ‘<위클리 경향> 보도에 대한 국정원 입장’이었다. 국정원은 “정부기관이나 기업의 시민단체 사업계약에 대해 영향력을 미칠 입장과 위치에 있지 않으며, 시민단체와의 계약이나 합의는 개별 정부 기관이나 기업의 고유 권한으로 국정원과 관련이 없다”고 강조했다. 국정원은 또 “박 상임이사와 <위클리 경향>에 대해 법적 대응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이후 언론은 ‘국정원 민간 사찰’, ‘지금은 신공안정국’, ‘국정원의 야비한 시민단체 탄압’ 등의 제목으로 이 사건을 기사화하거나 사설·칼럼에서 다뤘다. 한겨레는 6월24일자에서 1면 톱으로 진보단체 지원 중단에 ‘국정원이 개입됐다’는 기사를 크게 실었다.

이 기사에서 한겨레는 “진보적 시민·사회 단체에 대한 정부와 기업의 지원 사업이 줄줄이 끊기고 있다”면서 “이 과정에서 국가정보원이 개입하고 있다는 정황과 증언이 잇따른다”고 보도했다. 한겨레는 서울시와 환경부가 뚜렷한 이유없이 환경재단의 환경영화제 지원을 중단한 점 등을 예시했다. 시민단체에서도 박원순 이사의 주장을 뒷받침하며 엄호했다. 환경재단 이미경 사무총장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계속되는 진보단체의 압력에 대해 성토했다. 지원을 끊은 서울시에 지원을 재요청했더니 국정원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물론 서울시의 직원은 이 사실을 부인했다. <Weekly 경향>은 7월7일자 832호에서 이 문제를 커버스토리로 집중 다뤘다. 커버스토리의 제목은 ‘진보시민단체 고사작전-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법적대응 검토’ 3개월 지나서 소송

6월23일자 830호에 실린 희망제작소 박원순 상임이사의 인터뷰 기사. 오른쪽 아랫부분 내용이 국정원이 소송을 건 부분이다.

국정원은 그동안 언론 보도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8월1일 조선일보에 ‘못 말리는 국정원’이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리자 이 신문의 ‘알려왔습니다’라는 난에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거론한 관련 내용은 국정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알려왔습니다’라는 내용을 실었다.

법적 대응을 검토 중이라던 국정원은 9월14일 3개월이 지나서야 갑작스럽게 박 이사에게 소송을 냈다. 마침 박 이사가 지난 8월26일 참여연대가 마련한 ‘맥주 한 캔과 함께 나누는 박원순 변호사의 2009 세상 고민’이라는 강연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희망제작소가 정부와 연계해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려 했으나 그게 잘 안 된다”, “희망제작소야 안 하면 그만이니까 불이익이 없지만 이명박 정부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놓치는 것이니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이명박 정부는 바보”라고 밝힌 이후에 나온 터여서 이른바 정권에 의해 ‘괘씸죄’로 피소를 당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미국 체류 중에 소송 소식을 들은 박 이사는 16일 귀국했다. 이에 앞서 박 이사는 15일 자신의 홈페이지 ‘원순닷컴’에 “그래도 국정원이 저를 상대로 2억원이나 되는 소송을 제기했다니 참으로 영광이고 행복하다”고 국정원을 비판했다.

9월17일 박 이사는 서울 평창동 희망제작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진실은 이렇습니다’라는 글에서 국정원이 개인과 민간단체를 불법 사찰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례 15가지를 추가로 공개했다. 박 이사는 구체적인 사례로 ▲국정원 직원이 한 재단의 이사장을 찾아가 자신에 대해 탐문했고 ▲자신이 이사로 등재된 한 재단에 ‘돈을 얼마나 받고 있느냐’며 캐물었으며 ▲자신이 한 기업의 사외이사로 활동한 내역을 확인한 경우 등을 예로 들었다. 또한 수년째 운영하고 있는 ‘아름다운 가게’와 ‘아름다운 커피’ 등 사업에도 국정원이 잇따라 개입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는 “올해 4월 국정원 직원이 ‘아름다운 커피’ 매장을 연 한 대학의 관계자를 찾아가 ‘좌파 단체를 후원한 사유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국정원 직원이 곳곳에서 저에 대해 묻고 다닐 뿐 아니라 희망제작소 사업이 줄줄이 취소되거나 이유 없이 연기됐다”고 말했다. 박 이사는 이 밖에도 ▲진보 성향 단체들이 정부 지원 대상에서 배제되고 ▲특정 기업 임직원에게 시민단체 회원에서 탈퇴하라는 압력이 들어갔으며 ▲공공기관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회원 변호사에게는 사건을 맡기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갔다는 사례를 들며 “국정원의 개입이 일상화·구조화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기자회견 말미에 박 이사는 “이런 사회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면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세고 두려운 기관을 상대로 있지도 않은 허위 사실을 주장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 아닌가”라며 자신의 진정성을 표현했다. 국정원 관계자는 이에 대해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현재 소송 중인 건에 대해서 국정원이 왈가왈부할 입장이 아니다”라며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 김태열 기자 yol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