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연구]영어 과대망상증이 국어 좀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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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공교육화 문제점

‘이중언어’ 사회의 무서운 함정, “자기 뿌리 잃은 세계화가 과연 경쟁력인가”

한글 관련 학술 대표들이 지난 1월 30일 서울 정동의 한 식당에서 연어 몰입 교육 방안의 폐기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기 앞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남호진 기자

한글 관련 학술 대표들이 지난 1월 30일 서울 정동의 한 식당에서 연어 몰입 교육 방안의 폐기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기 앞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남호진 기자

이명박 정부의 영어교육정책에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이뤄지고 있다. 비판적인 전문가들은 새 정부의 언어정책 주창자들을 “우리 사회를 영어가 소통하는 ‘이중언어’ 사회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들은 언어정책 주창자들이 영어를 사실상 공용어로 만들어 우리 국어와 대등한 지위로 만들고자 한다는 것이다. 또 이를 바탕으로 국가 경쟁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발상’이라고 지적한다.

서울대 영어교육과 이병민 교수는 “이들이 영어 공교육과 영어교사들에 대한 엄청난 불만에서 내놓은 해결책은 교육학적이거나 언어 학문적인 접근도 아니고 현실에 대한 의도적인 무지에서 출발한 탁상공론이다”라고 주장했다.

실상 우리 사회는 그 사회에서 영어가 실제로 필요한지와 상관없이 입시, 입사, 승진, 고시 등 새로운 단계로 접어드는 전 단계에서 모든 당사자에게 영어 성적을 요구한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별것 아니지만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도 큰 장애물로 작용한다. 모든 사람이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모든 사람이 필요한 것처럼 포장하여 모든 국민이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합의’ 없이 ‘사회적 요구’ 강조
새 정부 담당자들의 발상이 단순하다는 비판에 직면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병민 교수는 영어 교육의 문제가 단순히 일개 교과목의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국가 수준의 영어교육정책은 국어정책을 포함하여 언어정책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서 만들고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영어교육정책이 정권의 유불리나 호불호에 따라 현재의 공교육과 전체 교육과정을 전면 부정하는 방식으로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전국영어교사모임 회장인 홍완기(용산고) 교사는 국민적 토론과 소통과정의 필요성을 이렇게 제기한다.
“인수위의 영어교육정책은 사회적 합의 없이 오히려 ‘사회적 요구’라는 명분으로 필요 이상의 영어 능력을 강조함으로써 영어에 대한 가수요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따라서 영어교육을 올바르게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에 대한 수요와 요구를 현실성 있게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영어교육의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것은 ▲전 국민의 영어 구사력이 곧 국가 경쟁력인데 ▲학교에서 10년간 영어를 배워도 기본적인 대화와 의사소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책이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는 해법도 거의 동일하다. ▲영어를 영어로 가르쳐야 하는데 교사에게 문제가 있으니 우수교사를 확보해야 하고 ▲연수를 확대하며 원어민 보조교사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교사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는, 교육과정을 고치면 된다는 식의 사고가 그것이다. 홍 교사는 인수위 영어교육정책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무엇을 가르칠지와 입시 구조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 없이 내놓은 영어교육 정상화 대책은 실패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제까지의 영어교육정책은 교육부가 뼈대를 정하고, 각종 협의회를 통해 이를 뒷받침하는 식으로 진행되어왔다. 아예 처음부터 이에 대해 장기적으로 연구할 독립 ‘위원회’ 또는 TF(태스크 포스) 팀을 구성해 정책을 연구해야 한다.”

조진희(영일초등학교) 교사는 “내일 모레 졸업을 앞둔 6학년 교실은 절망적이다. 이명박 당선인이 발표하는 재앙과 같은 교육정책들이 아이들의 설렘을 ‘한숨’과 ‘분노’로 바꾸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는 최근 전교조 주최로 열린 새 정부 영어교육정책 토론회에서 “다양한 교육활동을 하며 초등학교 마지막 2월을 보내야 할 아이들이 학력 평가를 대비하여 오지선다 영어 시험을 치면서 연필을 굴리고 있다”며 학교 현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조 교사가 우려하는 잘못된 영어교육의 부작용은 심각하다.

“‘orange’를 ‘오륀지’라고 읽고, ‘friendly’를 ‘후렌들리’라고 표기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은, 교육도 청계천처럼 뜯어내고 물이 흐르게 하면 될 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잘못 만든 청계천은 돈을 들여서라도 고치면 되지만 잘못된 영어교육, 잘못 배운 아이들은 어떻게 고칠 수 있나.”

“국어는 영어보다 열등” 의식 배양
조 교사는 지난 3년간 서울지역 초등학교에서 6학년 영어전담교사 2년, 6학년 담임 1년을 했고 이 가운데 1년 반 동안 원어민 보조교사와 함께 협력수업(co-teaching)을 한 경험이 있다. 1997년 7차 교육과정이 시작되기도 전에 ‘세계화 교육’을 한다며 들어온 초등 영어교육 10년의 현주소는 한마디로 “잃어버린 역사로 초등 영어교육 10년의 성과에 대한 어떤 객관적·질적 연구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이 과정을 통해 두드러진 현상이 ‘영어포기아’(교사들은 ‘영포’라고 줄여 말한다)의 증가다. 초등 고학년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본 교사들은 3학년부터 영어가 들어오고 5, 6학년 ‘영포’가 크게 늘었다”고 말한다. 영어에 아예 관심이 없고 아주 쉬운 단어나 문장도 말하고 듣고 읽고 쓰려 하지 않는 모습이 소위 ‘영포’의 특징이다.

올바른 국어교육을 뒷전으로 밀쳐놓고 열풍에 휩싸인 ‘유아 영어교육’도 심각한 부작용을 야기하고 있다. 2005년 동덕여대 아동학과 우남희 교수 연구팀의 ‘조기 사교육이 유아의 인지적·정서적·사회적 발달에 미치는 영향’에 따르면 유치원 원장들은 “조기 사교육의 학습 효과는 크지 않다”며 “자율성, 문제해결 능력, 능동성이 떨어지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응답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동시에 0점과 100점으로 끊임없이 낙인 찍으면서 서로 의사소통하면서 언어를 익히라는 모순된 학벌·입시구조하의 학교 시스템이 아이들을 영어로부터 도피하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한글문화연대 김영명 대표는 현재 심각한 수준의 국어 경시, 영어 과대 중시 경향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다. 김 대표는 “세계화를 지고의 선으로 부르짖고 있지만 자기 문화의 토대가 부실한 세계화가 과연 경쟁력이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10년 전에 비해 현격하게 약화된 국어교육은 심지어 “국어는 영어보다 열등한 언어”라는 의식까지 배양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이명박 당선인부터 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며, 국무위원이 되려는 사람들은 국어능력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또한 국어와 민족문화가 없는 이명박 정부의 세계화 정책은 사상누각이라고 지적한다. 인수위 홈페이지에는 한 고등학교 1학년생의 절규와 항변의 글이 다음과 같이 실렸다.

“우리나라 비보이들은 영어 한마디 못해도 외국에 나가서 몸으로 세계를 흥분시키고 있습니다. 김연아 선수가 영어를 잘해서 세계를 감동시키고 박지성 선수가 영어를 잘해서 프리미어리그에 든 게 아니잖습니까. 우리는 이미 세계화됐습니다. 그리고 우리 10대에게 필요한 영어는 돈을 벌기 위한 영어가 아니라 세계의 다른 10대들과 소통할 수 있는 우리만의 표현입니다. 제발 우리의 창의력을 당신들의 잣대로 억누르지 말아주십시오. 이것은 중대한 인권 침해입니다. 음악으로, 색깔로, 몸짓으로 소통하는 21세기를 당신들은 보지 못하는 겁니까?”

<한기홍 편집위원 glutton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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