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 기획된 삼성 사장단 ‘서명쇼’

박 대통령의 경제살리기 입법 촉구 서명운동에 불붙여… 신 정경유착 시대로

거의 ‘정치적 쇼’에 가까운 일이었다. 지난 1월 20일 삼성전자 서울 서초사옥에서 보기드문 광경이 벌어졌다. 이날 사장단 회의를 마친 삼성그룹 주요 계열사 사장들이 건물을 빠져나가기 전 1층 로비에 마련된 ‘경제살리기 입법 촉구 범국민 서명운동’ 부스에 들러 일제히 서명에 동참한 것이다.

서명에는 윤용암 삼성증권 사장, 삼성전자 김기남 반도체총괄 사장, 전영현 부품사업부문 메모리사업부 사장, 김현석 영상디스플레이 사업부 사장, 최치훈 삼성물산 건설부문 사장, 이윤태 삼성전기 사장, 김영기 삼성전자 사장, 박대영 삼성중공업 사장, 한인규 호텔신라 사장 등이 참여했다. 윤용암 삼성증권 사장은 서명 후 “입법이 되지 않으면 전 세계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 혼자 뒤떨어질 것 같다”며 “우리나라도 리더들이 이런 활동을 해주시고 입법이 잘됐으면 하는 생각에서 서명했다”고 말했다.

삼성 사장단의 ‘집단행동’이 가진 ‘파워’는 막강했다. 결연한 표정의 사장단 사진이 온라인을 뒤덮었다. 서명운동의 존재조차 모르던 이들도 삼성이 나섰다는 말에 관심을 가졌다.

삼성그룹 사장들이 지난 1월 20일 오전 서울 서초동 삼성그룹 사옥 1층 로비에 마련된 부스에서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단체들이 주도하는 ‘민생구하기 입법 촉구 천만명 서명운동’에 참여해 서명하고 있다. / 연합뉴스

창조경제혁신센터에 수백억원 지원
집중되는 관심이 부담스러웠던지 삼성그룹은 “회의를 마치고 나오던 중 마침 로비에 서명부스가 있어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사장단이 서명에 참여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매주 수요일마다 서초사옥에서 열리는 삼성 사장단 회의는 늘 매스컴의 엄청난 주목을 받는다. 회의에 참석하는 사장들을 보기 위해 기자들이 새벽같이 1층 로비에서 진을 치고 대기한다. 사장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심거리이고 기사가 된다. 모 사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는지, 웃고 있는지, 오늘은 무슨 옷을 입었는지 등등 사소한 것까지 뉴스에 등장한다. 과도할 정도다. 사장단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언론에 노출될 것을 감안해 되도록 말과 행동을 조심한다. 사장단의 집단행동은 매우 드문 일이며, 언론에 어떻게 비쳐질지 누구보다 잘 아는 게 삼성이다.

지난 20일에도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사장들을 보기 위해 기자들이 잔뜩 대기한 상태였다. 사장단이 집단서명에 참여한 게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해명은 부적절해 보인다. ‘서명쇼’는 다분히 사전 기획되고 연출됐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삼성 사장단의 서명쇼는 지지부진하던 서명운동에 불을 붙였다. 서명운동은 1월 14일부터 시작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13일 경제살리기 입법 관련 대국민담화를 내놓자 재계에서는 바로 당일 “박 대통령의 담화에 공감한다”며 범국민 서명운동본부를 꾸렸다. 14일부터 각지에 공문을 보내 서명운동 참여를 독려했다.

초반에는 별로 관심을 못 받았다. 전경련은 주요 대기업에 서명부스 설치 여부를 물었지만 초반에 이를 수용한 건 삼성전자뿐이었다. 서명운동이 시작된 지 6일이 지난 20일까지 사옥에 서명부스가 설치된 곳은 삼성 서초사옥이 유일했다. 일부 금융권에서는 서명을 종용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삼성 사장단의 서명쇼로 전세는 역전됐다. 이후 현대차, LG, SK, CJ 등 주요 대기업들이 줄줄이 서명에 참여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관제서명운동’이라는 비판이 제기됐지만 누구도 아랑곳하지 않는 분위기다. 서명에 동참한 한 대기업 관계자는 “삼성이 했는데 우리가 안 할 수 있겠나”라며 “청와대에 찍히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삼성에 이어 주요 대기업으로는 두 번째로 사옥에 서명부스를 설치한 CJ는 총수인 이재현 회장이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서명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대한상공회의소의 박용만 회장(두산)은 최근 정부로부터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리는 면세점 사업권을 따냈다. 이들 모두 서명운동 참여 이유가 “국가 경제를 위한 선택”이라고 밝히고는 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들이 존재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나오는 청년희망펀드 홈페이지 화면.

대기업 관계자 “청와대에 찍히면 곤란”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재계에서 벌어진 일들을 돌아보면 ‘신정경유착 시대’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대표적인 게 ‘창조경제혁신센터’다. 창조경제는 박 대통령 경제정책의 핵심이다. 창조경제혁신센터는 창조경제를 진두지휘하는 전국 각 지역의 거점본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전국 17개 광역시·도에 빠짐없이 설치됐고, 각 센터마다 주요 대기업들이 참여해 많게는 수백억원이 넘는 자금을 댔다. 정부의 최고 역점 경제정책 사업부터 재계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셈이다.

창조경제혁신센터 설립에 대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보긴 어렵다. 대기업들의 참여가 결정된 것은 기획재정부 장관이 ‘긴급회의’를 명목으로 주요 대기업 임원들을 불러모은 직후였다. 뒤늦게 대기업이 들어오다 보니 이미 개소식까지 완료한 지방의 한 혁신센터는 대기업을 포함한 개소식을 다시 한 번 하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박 대통령은 각 지역 창조경제센터 개소식에 대부분 직접 참석했다. 대기업 오너들에게는 개소식에서 박 대통령과 ‘인증샷’을 찍는 게 필수 코스였다.

재계에 창조경제센터와 관련한 불만이 팽배하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행여 불이익을 당할까 대놓고 말을 안할 뿐 비공개석상에서는 창조경제센터와 정부를 비난하는 재계 사람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창조경제센터를 운영 중인 한 대기업 관계자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적어도 기업들을 불러다가 정책참여나 협조를 강요하는 이른바 ‘쪼인트(무릎) 까기’는 없었다”며 “현 정권에선 이런 일이 당연하다는 듯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창조경제센터 운영과정에 정부가 지나치게 개입한다는 불만도 있다. 다른 한 대기업 관계자는 “창조경제센터 출범 1주년 등과 같은 기념일에는 회사 차원에서 행사를 준비하는데도 어김없이 정부에서 ‘무엇을 준비했냐’는 식으로 독촉전화가 온다”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가 성과가 무엇이 있는지, 언론에 보도자료를 어떻게 배포할 것인지 등을 꼬치꼬치 캐묻는다는 것이다.

정부의 강권에 못 이겨 참여했다 해도 정경유착은 정경유착이다. 대기업들이 정부 협조를 통해 어쨌든 이득을 본 것도 사실이다. 정부는 법인세 등 세제 개편문제나 고용·노동·환경 문제 등에서 친기업적인 정책을 쏟아내며 ‘보상’을 해줬다. 박 대통령의 공약의 하나인 ‘경제민주화’는 한때 재벌개혁의 상징처럼 여겨졌지만, 현재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렇다 보니 박 대통령이 하는 일이라면 재계가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일이 당연한 수순이 돼버렸다.

‘박근혜 펀드’로 불리는 ‘청년희망펀드’도 마찬가지다. 청년희망펀드는 지난해 9월 15일 국무회의에서 박 대통령이 “청년 고용을 해결하자”며 조성을 제안한 게 출발점이었다. 박 대통령은 개인재산 2000만원과 월급의 20%를 매월 기부하기로 하며 ‘1호 기부자’로 이름을 올렸다.

기업들의 기부행렬이 시작됐다. 당시에도 삼성그룹이 스타트를 끊었다. 이건희 회장 사재 200억원 및 임직원 모금 50억원 등 250억원을 기부했다. 이후 현대차(200억원), LG(100억원), 롯데(100억원), SK(100억원) 등 5대 기업들이 기부행렬에 동참했다.

기업들은 연말에 전국적으로 모금운동을 벌이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연간 가장 많은 기부금을 낸다. 삼성은 올해 500억원을, 현대차는 250억원을, SK와 LG는 각각 120억원을, 롯데는 70억원을 냈다. 포스코, 효성, GS, 두산, 한화, 신세계, 한진, 코오롱, LS, CJ 등 주요 대기업들도 연말 기부금 수준에 맞먹는 수십억원대의 기부금을 냈다.

모금 4개월여 만에 청년희망펀드에는 1300억원이라는 거금이 모였다. 모금액 대부분은 기업들이 낸 돈이다. 오너가 없는 KT의 경우 임직원들에게 기부금을 내도록 종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28일 청년희망펀드를 관리하는 청년희망재단을 방문해 “노동개혁을 완수해 청년 일자리를 늘리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청년실업률은 9.2%로 역대 최악을 기록했다.

<송진식 경향신문 산업부 기자 truej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