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정치 리스크’ 덮쳤나

기관마다 백가쟁명식 하반기 전망… 정부는 ‘좋다’에 방점

“구조개혁이 가시적 성과를 내고 통화정책이 뒷받침돼야 올해 성장률 3.0%가 나온다. 잘못하면 2.8%가 될 수도 있다.”(한국개발연구원 관계자, 5월 20일)

“완만한 경기개선 흐름에 따라 가계소득 증가세가 지속되고 있다. 하반기에는 가계 소비지출이 점차 증가할 것이다.”(기획재정부, 5월 22일)

경제연구소들은 ‘하향조정’이 대세
하반기 한국 경제는 좋을까 나쁠까. 전망은 기관마다 엇갈리고 있다. 정부는 ‘좋다’에 방점을 찍은 상태다. 민간연구기관과 국책연구기관, 해외연구기관은 기관에 따라 평가가 다르다. 상반기의 마지막인 6월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컨센서스(합의)는 좀처럼 형성되지 않는다. 이례적이다. 지표가 원체 들쑥날쑥한 것이 근본 원인이지만 정치 리스크도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둔 수싸움이 벌써 시작됐다는 얘기다. 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본질이 달라 보이는 ‘라쇼몽 효과’가 한국 경제를 덮치고 있다.

주요 경제연구소들이 보는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은 ‘하향조정’이 대세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5월 20일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3.5%에서 3.0%로 0.5%포인트 내렸다. KDI는 3%를 제시했지만 속내는 2%대다. 김성태 KDI 연구위원은 “구조개혁 정책이 원활하게 추진되지 못하거나 추가 금리인하, 세입 여건 개선 등이 실현되지 않을 경우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2%대로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며 “이 경우 성장률은 (3.0%에서) 0.2%포인트 내려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사실상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이 2.8%까지 내려갈 수 있다는 의미다. 노·사·정 대타협이 결렬되면서 구조개혁이 쉽지 않은 상태다. 올해도 국회 예산정책처는 이미 3조원 이상의 세수결손을 전망했다. KDI는 향후 1~2회 추가 금리인하를 전제했지만 한국은행은 난색을 보이고 있다. 0.2%포인트를 만회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얘기다.

5월 20일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여타 기관들도 줄줄이 조정치를 내렸다. 한국은행은 3.4%에서 3.1%로, 국회 예산정책처는 3.3%에서 3.0%로 올해 성장률을 수정 예상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역시 최근 3.3%에서 3.1%로 내렸다. 지난해 10월 IMF의 최초 전망은 4.0%였다. 종합해 보면 대부분 기관의 전망치는 3.0%에 걸려 있다. 해외 IB들도 다르지 않다. BOA 메릴린치(3.1%)와 시티그룹(3.1%), HSBC(3.1%), JP모건(3.0%) 등은 3% 마지노선에 걸쳐 있다. 더 나쁘게 본 곳도 있다. BNP파리바는 2.7%, 노무라증권은 2.5%까지 낮춰 잡았다.

정부는 이들의 전망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현재 정부 전망치는 3.8%다. 다음 달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에서 수정 전망치가 나올 예정인데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미 3.3%를 언급한 상태다. 최 부총리는 최근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 참석차 방문한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2분기에는 1%대 성장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반기 경제회복 가능성을 점치는 유일한 기관은 금융연구원이다. 금융연구원은 당초 5월 12일 예정됐던 수정 경제전망 발표를 한 달가량 연기했다. 4월 경제지표가 1분기와 달리 호전될 가능성이 있어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금융연구원은 지난해 10월 올해 성장률을 3.7%로 제시했다. 한때 금융연구원은 성장률 2%대 하락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정부와 금융연구원이 주목하는 지표는 내수다. 4월 신용카드 승인액이 15.3% 뛰었고, 백화점 매출액도 1.5% 증가세로 돌아섰다. 휘발유와 경유 판매량도 8.7% 늘어났다. 경기가 좋으면 카드 소비가 늘어나고 백화점도 판매액이 증가한다. 차를 많이 몰고 야외로 나가기 때문에 유류 소비량도 증가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이 장단에 맞장구를 치고 있다. OECD에 따르면 한국의 3월 기준 경기선행지수(CLI)는 102.0으로 2010년 4월(102.1) 이후 3년 11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OECD 경기선행지수는 6∼9개월 뒤 경기 흐름을 예측하는 지표로, 재고순환지표·주가지수·장단기 금리차·제조업 경기전망 등을 근거로 산출된다.

시장에서는 한국의 경기진단이 이처럼 장시간 엇갈리는 이면에는 ‘정치 리스크’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벌써 시장에서는 최 부총리를 ‘국회로 돌아갈 사람’으로 분류한 분위기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최 부총리가 아무리 늦어도 연말에는 돌아갈 것 아니냐”며 “새로운 정책을 내놓기도 힘들 거고, 내놓은들 약발이 먹혀들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장관들이 내년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서는 내년 1월까지 물러나면 된다. 문제는 여당 내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점이다. 김무성-유승민 체제가 탄력을 받으면서 당내 친박들의 입지가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성과가 없으면 (장관들을) 당에서 받지 않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내년 총선에는 당의 전략공천 없이 철저히 당원투표로 후보를 선출하겠다는 입장이어서 친박들의 조기 복귀가 불가피하다.

최 부총리 ‘국회로 돌아갈 사람’으로 분류
최 부총리의 국회 컴백은 총리 내정과정에서 한덕수, 윤증현 전 기재부 장관의 총리설이 제기되는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최 부총리가 떠난 뒤 행정부 내 경제통이 필요한데, 그러려면 경제총리가 불가피하다는 논리였다.

최 부총리는 지친 모습이 역력하다. 최저임금 인상, 노·사·정 대타협 등이 잇따라 무산되면서 기가 꺾였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국무총리 후보자로 내정이 될 때까지 총리대행, 경제수장, 국회의원 등 ‘1인 3역’을 한 것도 조기 소진의 원인이 됐다. 최 부총리는 최근 사석에서 “이 정도면 지칠 때도 되지 않았느냐”며 피곤함을 감추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 강조했던 경제인에 대한 사면과 가석방 얘기도 더는 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킬 추가경정예산에 손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추경을 하면 틀림없이 재정문제가 제기될 텐데 2~3년 뒤 자칫 재정이 악화되면 그 부담을 전부 떠안게 될 가능성도 있지 않겠느냐”며 “아무래도 추경문제에 적극적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최 부총리가 주춤하자 여당은 슬그머니 숟가락을 놓고 있다.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KDI가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하향조정한 다음날인 5월 21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부는 성장이 둔화되고 재정이 악화되는 이중고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경제정책 전반에 무엇이 잘못됐는지 재점검해야 한다”며 압박했다. 여차하면 정치권이 경제문제에 개입할 수 있다는 의미다.

기재부는 다음 달 발표할 하반기 경제운용 대책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정말 지금으로서는 말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며 “큰 틀의 방향도 잡혀 있지 않아 우리도 모른다”고 말했다. 정부의 하반기 경제운용 방향은 앞으로 한 달 간 경제지표와 정치지형의 변화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에 따라 향후 정부 경제정책도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추경으로 갈 수도, 확장적 기조를 유지하는 수준에 그칠 수도 있다. 최 부총리는 지금 주사위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m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