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민주화는 ‘먼 나라 이야기’

자동차정비업체·편의점 가맹점 등 중소상공인들 ‘을의 설움’ 여전

“자동차정비업이 지난해 5월 중소기업적합업종으로 지정됐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습니다. 우리 같은 정비업계로 봐서는 다행이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삼성화재나 현대해상화재보험, 동부화재 등과 같은 대기업 보험사들이 영세 자동차정비업체들을 노예 다루듯하는 불공정 관행부터 하루빨리 뿌리뽑아야 합니다.”

서울 강북지역에서 자동차정비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석명훈 대표는 3년 전부터 대기업 보험사가 발주하는 사고차량 수리 의뢰를 일절 받지 못하고 있다. 대기업 보험사의 입고지정업체였다가 그 간판을 떼인 것이다. 입고지정업체란 특정 보험사가 사고차량 수리·정비를 상시 맡기는 업체를 말한다.

중소제조업체가 몰려 있는 인천 남동공단. | 이상훈 선임기자

보험사 사고차량 수리 과도한 꺾기
석 대표로서는 큰 타격이었다. 석 대표가 대기업 보험사에 밉보인 것은 수리비 다툼 때문이었다.

“보험사는 사고차량 수리·정비를 맡기면서 당연한 듯 과도하게 꺾기를 요구합니다. 제조업 중소기업으로 치면 납품단가 후려치기인 셈이죠. 보험사가 요구하는 단가에 맞추다보면 정비가 부실하게 될 수밖에 없어요. 결국 피해를 보는 쪽은 소비자들(보험가입자)입니다. 보험사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면 입고지정업체에서 제외시키는 일이 다반사예요. 노예계약이 따로 있습니까?”

석 대표는 지금은 일반 차량 정비만 하고 있다. 매출은 다소 줄었지만 마음은 편하다. 자신이 일한 만큼 소비자에게서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당선되자 자신이 몸담고 있는 자동차정비업계를 포함한 중소기업 사정이 나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손톱 밑의 가시’가 빠지는 것도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손톱 밑의 가시’는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과정에서 처음 언급했다. 2012년 8월 30일 서울 여의도에 있는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중소기업인들과 점심을 같이한 자리에서다.

박 후보는 “작지만 손톱 밑 가시를 뽑아내듯 중소기업을 위해 불합리한 제도와 관행을 고쳐나가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에 불합리하게 돼 있는 법·제도·관행 등을 정비해 경제민주화를 실현해나가겠다는 의지였다.

이에 중소기업중앙회는 대선이 끝난 뒤 전국의 회원사들을 대상으로 손톱 밑 가시 사례 274건을 책자로 만들어 인수위원회에 제출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어요. 자동차정비업이 중소기업적합업종으로 지정됐지만 영세 정비업체 보호는 여전히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부산에서 자동차정비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유흥식 대표의 말이다. 유 대표는 중기중앙회가 인수위에 제출한 책자에서 대기업의 무분별한 자동차정비업 진출을 막아야 한다는 요지의 손톱 밑 가시 사례를 제출한 바 있다.

유 대표는 “동반성장위원회가 대기업 프랜차이즈 정비업체 가맹점 수를 연간 2% 이내로 확장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바람에 대기업 정비업체는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영세 정비업체는 장사가 안 돼 스스로 문을 닫는 업체들이 많은데 말이지요.”

이익금 60% 가져가는 편의점 본부
편의점 업계 사정도 이와 비슷하다. 방경수씨는 서울 노원구 창동에서 편의점을 하다 지난해 8월 사업을 접고 지금은 농사일을 하고 있다. 편의점 가맹본부의 과도한 이익금 회수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그는 월 이익금 규모와 편의점 상호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방씨는 지난해 전국편의점가맹점사업자단체협의회장을 맡아 편의점주의 권익을 높이기 위해 활동을 하기도 했다.

“편의점 운영 이익금의 60%는 대기업 본사(가맹본부)가 가져가도록 돼 있습니다. 이익금의 40%만 내 손에 떨어지는데, 그걸로 아르바이트 점원 2명 월급을 포함해 각종 경상비용을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없어요. 내가 누굴 위해 일하고 있는가 하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그는 편의점 사업을 접었지만 경제민주화의 현주소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방씨는 “공정위가 발표한 모범거래기준 및 가이드라인 정비에서 신규가맹점 거리제한 기준이 사라진 것은 대기업의 논리가 철저하게 반영된 결과”라면서 “신세계가 올 연말에 편의점 사업에까지 진출하게 되면 편의점주들은 더 어려워지게 될 것이 뻔하다”고 말했다.(공정위가 거리제한 규정을 없앤 것은 영업지역 침해 금지의무를 명시한 개정 가맹사업법이 지난 8월부터 시행됐기 때문이다)

중소기업 10군데 중 6곳은 납품단가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경제민주화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중소기업인들이 사업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꼽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적정한 납품단가다.

중기중앙회가 실시한 중소제조업 납품단가 반영 실태조사를 보면 납품단가 적정성에 대해 ‘부정적’이라고 응답한 기업이 61.7%를 차지했다. ‘긍정적’이라고 응답한 기업은 38.4%에 불과했다. ‘부정적’이라고 응답한 기업은 단가가 평균 15.7% 더 인상돼야 한다고 응답했다. 조사는 지난 4월 중소제조업 300개사를 대상으로 했다.

납품단가 후려치기 방지 등을 위한 제도적 장치도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골자로 한 하도급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대기업의 납품단가 후려치기를 고발한 중소기업은 아직까지 한 군데도 없다.

한 중소기업인은 “납품단가 후려치기를 고발하려면 대기업과 거래관계를 끊을 각오를 하고 민사소송을 해야 한다. 하도급법은 중소기업을 보호하겠다는 진정성이 전혀 없는 법”이라면서 “고발 기업의 익명성은 최대한 보장해주는 상태에서 해당 대기업은 징벌적 손해배상을 할 수 있도록 제도가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세종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원장은 “하도급법의 실효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이 법이 완전히 정착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경제개혁연구소는 지난 8월 말 박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정책을 중심으로 공약이행평가 보고서를 내놨다.

보고서를 보면 박 대통령이 대선 때 공약한 사항 중 국회 논의를 거쳐 확정된 법안은 공정거래위원회의 전속고발권 폐지(공정거래법), 징벌적손해배상제 도입(하도급법) 등 9건에 불과해 100점 만점에 26.5점으로 평가했다.

경제개혁연구소는 “정부와 새누리당은 경제민주화 법안을 추진함에 있어 대선공약 및 국정과제를 법의 실효성을 따지지 않고 단순히 법문에 반영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고 그나마 추진이 지연되는 경우가 많다”면서 “박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정책 추진 의지가 퇴색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밝혔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1994년 참여연대가 창립되면서 주창했던 경제민주화를 박근혜 대통령이 들고 나왔을 때부터 선거용이 아니었나 의심을 샀다”면서 “집권한 지 1년 반 남짓 지났는데 사실상 경제민주화는 실종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최병태 선임기자 cbta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