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밀어내기 아닌 밀어내기 같은 불공정거래

막무가내식 형태는 많이 없어졌지만 교묘한 방법의 ‘갑을관계’는 여전

4년째 남양유업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는 박정훈 대표(가명)는 요즘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남양유업 본사에 지불해야 할 ‘부당한’ 거래대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말 현재 누적 금액이 얼추 1000만원을 훌쩍 넘었다.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만 본사는 선뜻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박 대표는 본사와 거래하면서 한 달에 약 50만~70만원을 손해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마트 같은 대형 유통업체가 판매 촉진을 위해 벌이는 할인행사 비용 일부를 자신이 떠안고 있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남양유업의 위탁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다. 위탁대리점이란 이마트나 백화점 등 유통업체로부터 받은 주문물량을 본사를 통해 유통업체에 공급하는 대리점이다. 지역 소매상인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일반 도매대리점과는 약간 다른 형태다. 주요 수입원은 판매알선 수수료다.

“남양유업이 본사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대리점에 제품을 강매해온 이른바 밀어내기 문제는 많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대리점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무척 다행스런 일이죠.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형태의 밀어내기는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지난해 5월 서울 남대문로 남양유업 본사 앞에 남양유업 제품들이 길바닥에 버려져 있다. 남양유업의 밀어내기 횡포에 항의하는 대리점 운영자들은 약 두 달 동안 피해보상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판촉행사 비용 대리점에서 부담
유통업체의 판촉행사 비용을 자신이 부담하는 것도 박 대표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밀어내기의 일종이다. 대형마트의 할인행사는 보통 위탁대리점 의사와는 상관없이 전적으로 유통업체와 본사의 계약에 의해 이뤄진다. 그런데 정작 비용은 위탁대리점주가 부담하는 게 부당하다는 얘기다.

박 대표는 기자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혹시 자신의 이름이나 대리점 운영 장소가 지면을 통해 남양유업에 알려질까봐 한 마디 한 마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이후 자신이 보게 될 피해를 생각해서다.

남양유업의 밀어내기 관행은 지난해 5월 영업사원의 막말 파문을 통해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남양유업 사태를 계기로 본사와 대리점 간 불공정거래를 근절하기 위해 곧바로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그러나 공정위는 거의 1년이 지나서야 대책을 내놓았다.

‘계속적 재판매거래 등에 있어서의 거래상 지위 남용행위 세부 유형 지정고시’다. 이 고시는 지난 5월 12일부터 본격 시행됐다.

고시를 보면 판매업자가 벌이는 판촉행사 비용 부담을 대리점에 강요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도 분명 포함돼 있다. 박 대표가 속앓이를 하고 있는 판촉행사 비용 부담도 분명 고시 위반이다. 카페베네가 최근 19억2000만원의 과징금 폭탄을 맞은 것도 바로 판촉행사 비용을 가맹점에 떠넘겼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아직은 액수가 고발할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참고 있다”면서 “우리가 고발하지 않으면 공정위는 고시 위반을 어떻게 파악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지난해와 같은 막무가내식 밀어내기 행태는 분명 많이 없어졌지만, 일선 대리점주들이 겪고 있는 교묘한 수법의 밀어내기 행태는 아직도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게 대리점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판매목표제, 성과급제도, 본사의 임의 물량 배정 등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고종상 남양유업대리점협의회장은 “사실상 달성하기 어려운 판매목표제를 정해놓고 그것을 달성하지 못하면 각종 지원을 줄이는 행태는 남양유업뿐 아니라 대리점을 두고 있는 다른 대기업들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면서 “본사와 대리점의 불균형 관계가 바로잡아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제조업 본사의 끼워팔기 방식도 보이지 않는 밀어내기의 하나로 꼽힌다.

이창섭 전 남양유업대리점협의회장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지금 대리점의 권익 향상을 위해 전국 제조업 대리점협의회 구성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느 농심 대리점이 시장에서 잘 팔리는 신라면 100박스를 주문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본사에서는 대리점 요구대로 100박스를 다 안 주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대신 상대적으로 덜 팔리는 너구리를 40박스 끼워주는 식입니다. 대리점은 신라면 100박스를 팔 때보다 매출이 당연히 떨어지게 되고, 본사 입장에서는 재고를 대리점에 떠넘기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남양유업방지법’ 국회 논의 서둘러야
대리점을 상대로 한 본사의 교묘한 차별도 존재한다. 본사에 우호적인 대리점과 그렇지 않은 대리점 간에 차별을 두는 행태다. 말하자면 대리점 길들이기 수법이다.

남양유업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한홍 대표(가명)는 본사의 이런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경우다.

김 대표는 “본사에서 어떤 대리점한테는 공급가격에서 10% 할인된 가격으로 물품을 공급하고, 우리 같은 대리점한테는 100% 다 받는다”면서 “우리처럼 본사에 낙인 찍힌 대리점을 고사시키려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남양유업의 밀어내기 횡포를 고발했던 100여개 대리점 중 지금도 대리점을 계속 운영하고 있는 30여곳에 대한 일종의 보복이라는 주장이다.

대리점주들의 이런 지적에 대해 남양유업은 펄쩍 뛴다. 지난해 이후 어떤 형태로든지 불공정한 거래관계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최경철 남양유업 홍보상무는 “지난해 밀어내기 파동 이후 회사 목표를 매출 증대에서 대리점 조직 안정으로 바꿨다”면서 “현 상황에서 매출을 늘리기 위해 대리점을 상대로 무리한 계약을 요구할 이유도 없다”고 말했다.

결국 밀어내기라는 갑의 횡포를 근본적으로 근절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는 법적인 제도 마련으로 귀결되고 있다.

바로 남양유업방지법 제정이다.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지난해 5월 ‘대리점 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지만 아직 국회에서 논의조차 안 되고 있다.

이 법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과 대리점 사업자단체 구성 및 단체교섭권 보장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본사가 대리점을 상대로 부당행위를 일삼아 대리점 사업자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 대리점 사업자가 입은 손해의 3배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배상책임을 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또 대리점 사업자의 단체교섭권은 대리점끼리 일종의 노조 성격인 사업자단체 구성을 허용해 본사와 대등한 위치에서 거래조건 등에 관해 협의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법은 역설적이게도 공정위가 제동을 걸면서 법 제정이 늦어지고 있다. 공정위는 지난 5월 시행에 들어간 고시를 몇 년간 운영해본 뒤에 이를 법률화해도 늦지 않다는 입장이다. 또 대리점 사업자 범위를 어떻게 한정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도 더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종걸 의원실 관계자는 “대리점 사업자 범위에 대해서는 여야가 최근에 합의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법안을 논의할 토대가 마련됐다”면서 “이르면 10월 정기국회 때 법안 통과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양유업 대리점 피해배상 문제를 줄곧 맡아왔던 민변 소속 김철호 변호사는 “법안의 핵심인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박근혜 정부의 대선 공약에도 포함돼 있었다”면서 “법안이 하루빨리 통과돼 본사와 대리점 간의 불공정관계가 해소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병태 선임기자 cbta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