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쌀개방 초읽기 ‘발등에 떨어진 불’

필리핀의 유예요청 부결로 올해 안에 결정해야 할 한국도 고민 깊어져

4월 9일 스위스 제네바. 세계무역기구(WTO) 상품무역이사회에서 필리핀이 제안한 쌀 개방 5년 유예 요청이 다시 부결됐다. 미국, 캐나다, 태국, 호주 등 이사국들의 입장이 달랐다. 필리핀의 추가 유예 제안이 부결된 것은 2012년 3월 30일에 이어 두 번째다. 한국이 이번 협상에 관심을 갖고 지켜본 것은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도 연말까지 쌀 개방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WTO와의 약속대로라면 내년부터 쌀 시장을 전면 개방해야 한다.

농림축산식품부는 “9일(현지시간) WTO 상품무역이사회에서 필리핀 정부가 요구한 ‘웨이버’(Waiver·일시적 의무면제)가 부결됐다”고 밝혔다. 필리핀은 이번 회의에서 쌀 개방 유예를 5년 더 연장하기 위해 상당한 선물보따리를 내놓았다. 필리핀 정부가 반드시 수입해야 하는 의무수입 물량(MMA)을 현행보다 2.3배 늘리고, 희망하는 모든 국가로부터 쌀을 수입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되면 지금은 매년 35만톤의 쌀을 수입하지만 앞으로는 80만5000톤을 수입해야 하고, 지금은 3개국에서만 의무적으로 쌀을 사면 되지만 앞으로는 7개국으로부터 쌀을 의무적으로 사야 한다. 쌀 수입 때 매기는 관세도 현행 40%에서 5%포인트 깎은 35%만 받겠다고 했다. 5년 연장하는 대가 치고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런데도 이사국들은 더 요구했다. 쌀 이외 다른 농축산 관심 품목의 수입관세를 깎아줄 것을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필리핀에 수출하는 닭고기나 돼지고기 관세 인하를 추가로 요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축산농가의 극렬한 반발이 우려되는 만큼 필리핀으로서는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요구였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쌀 수출국가들은 대체적으로 합의했는데, 쌀 외 다른 농축수산물을 갖고 있는 국가들이 합의를 해주지 않은 것 같다”며 “이번 협상은 농업협상이 아닌 ‘웨이버’ 규정을 이용한 것으로, 농업위원회가 아닌 상품무역이사회에서 결정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3일 서울 양재동 aT센터 앞에서 전국농민회총연맹 회원들이 쌀시장 전면개방 저지투쟁 선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날 aT센터에서는 농림축산식품부가 주최하는‘쌀 관세화 유예 종료 대응방안 토론회가 열렸다. / 강윤중 기자

개방 유예 두 차례 연장기한 올해로 끝나
WTO 회원국 중 쌀 시장을 개방하지 않은 나라는 한국과 필리핀밖에 없다. 두 나라는 쌀을 개방하지 않는 대신 의무수입 물량을 정해 그만큼만 매년 수입하기로 했다. 나머지 국가들은 수출업자들이 관세만 내면 자유롭게 쌀을 수출할 수 있다. 마치 다른 공산품처럼 말이다. 이것을 ‘쌀 관세화’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관세화란 정부가 수입물량 제한 등을 하지 않고 국내외 가격차만큼 설정된 관세를 납부하면 해당 품목 수입이 가능하도록 하는 조치다. WTO는 회원국들에게 쌀을 포함, 모든 상품에 대해 자유롭게 교역할 것을 강제하고 있다.

다만 쌀이 워낙 민감하다 보니 WTO는 농업협정 부속서에 특별대우 조항을 뒀다. 일종의 예외조항이다. 특별대우 받는 나라들은 쌀 개방을 유예할 수 있고, 또 한 차례에 걸쳐 기간을 추가적으로 연장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이 조항에 따라 한국은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서 개발도상국으로서 쌀 개방 예외가 허용됐다. 일본, 대만, 필리핀 등도 쌀 개방을 유보했다. 식량안보와 농민들의 반발 등을 두루 고려한 조치였다. 한국과 필리핀은 10년씩, 일본은 6년, 대만은 1년이었다.

쌀 개방 유예에는 조건이 있었다. 해당국 정부는 10년간 국내 소비량의 4%까지 쌀을 의무수입하도록 강제됐다. 한국의 의무수입 물량은 1995년 5만1000톤에서 2004년 20만5000톤으로 크게 늘어났다.

이 조치는 생각보다 가혹했다. 일단 정해진 의무수입 물량은 추후 쌀 개방이 되더라도 해당국이 무조건 수입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늦게 개방할수록 해당국의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일본은 2000년 쌀 개방을 앞두고 1년 앞선 1999년 쌀 시장을 조기 개방했다. 의무수입 물량을 68만2000톤에서 묶기 위해서였다. 대만은 1년 유예기간이 끝난 2003년 쌀 시장을 개방했다.

하지만 한국과 필리핀은 한 차례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2004년 시한이 만료되자 한국은 2014년까지 10년, 필리핀은 2012년까지 7년 더 쌀 개방을 연기하기로 WTO와 합의했다. 그 대가로 한국은 2005년 22만5000톤을 시작으로 매년 2만톤씩 늘려 2014년에는 40만9000톤의 쌀을 의무수입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 쌀 소비량이 400만톤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10% 정도는 의무수입 물량이 차지하는 셈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쌀 자급률이 91%까지 추락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의무수입량 늘리면 쌀 자급률 더 하락
2012년 필리핀의 연장기간이 끝났다. 필리핀은 2차 연장을 원했지만 WTO 규정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찾은 게 ‘웨이버’였다. WTO 설립을 위한 마라케시 협정 제 9.3조를 보면 예외적 상황에서는 회원국의 의무를 면제해줄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회원국의 의무란 모든 상품에 대한 수입을 허용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가 주생산품인 나라에 다아이몬드 수입이 급격히 이뤄질 경우 경제가 치명타를 입으면서 국가경제가 붕괴될 수 있다. 이럴 때는 예외적으로 수입을 금지할 수 있다. 의무면제는 1년 미만만 허용된다. 또 연장하고 싶으면 회원국들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필리핀은 이 조항을 끄집어냈다. 그러다 보니 농산물 개방협상이 농업위원회가 아닌 상품무역이사회로 넘어갔다.

한국도 한때 쌀 조기 개방을 검토한 적이 있다. 의무수입 물량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다. 차라리 쌀을 조기 개방해 관세를 붙여서 우리 쌀과 경쟁을 붙이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쌀 개방’은 정서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때마침 미국산 쇠고기 파문이 일면서 농업문제는 건드리기 힘든 이슈가 됐다. 누구도 감히 ‘고양이 목의 방울달기’를 할 수 없었고, 조기 개방의 기회를 놓쳤다.

농림부 이동필 장관은 지난해 “쌀 관세화(쌀 개방)를 연내 결단내리겠다”며 농민단체를 압박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 결단은 내려지지 않았다. 6월 4일 지방선거 때문이다. 일정으로 보자면 6월 말에는 쌀 개방 여부가 결정돼야 한다. 한국이 수입관세율 등을 정해 쌀 개방 일정을 WTO에 통보하는 마지노선은 9월이다.

한국이 결정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사실상 두 가지로 좁혀졌다. 하나는 필리핀처럼 ‘웨이버’ 조항을 이용하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쌀 시장 전면 개방이다. 문제는 한국은 필리핀처럼 5년가량 쌀 개방을 유예하는 조건으로 지금보다 의무수입 물량을 두 배가량 늘리기 어렵다는 점이다. 현행보다 두 배가량 의무수입 물량을 늘리면 국내 쌀 소비에서 의무수입쌀이 차지하는 비율이 20%에 육박하게 된다. 쌀 자급률은 80%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농림부 관계자는 “필리핀이야 쌀 수입이 많은 나라이니 의무량을 늘려도 상관없지만, 우리 쌀산업은 큰 타격을 입을 것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만약 쌀 개방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면 쌀 수입관세가 초미의 관심사가 된다. 의무적으로 수입되는 쌀에 대해 한국이 붙인 관세는 고작 5%다. 하지만 쌀 개방을 하면 300∼500%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관세 200% 정도면 수입쌀이 국내쌀보다 더 비싸질 수 있다. 문제는 자유무역협정(FTA)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면 쌀 관세가 인하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박형대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은 “고율 관세를 정하기도 생각보다 쉽지 않지만, 고율 관세를 매긴다고 해도 각종 자유무역협상에서 쌀 관세를 줄이려는 시도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