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의 장남 이맹희 주식청구 소송… 삼성의 CJ달래기 관심
삼성가에서 ‘비운의 황태자’라고 불리던 이맹희씨가 화제의 중심에 다시 섰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 만이다. 이맹희씨는 이병철 회장의 맏아들이지만 삼성 경영권은 셋째 동생 이건희 현 삼성전자 회장에게 돌아갔다. 이후 맹희씨는 가족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을 만큼 은둔의 삶을 살았으며, 지금도 중국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다.
그런 맹희씨가 소송과 함께 등장했다. 이맹희 대 이건희. 걸린 액수만 최고 2조원에 달하는 거액이다. 경우에 따라 삼성 지배권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규모다. 그 이면엔 맹희씨의 아들 이재현 CJ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 등 후계 세대에 미칠 영향까지 고려한 뒤늦은 ‘왕자의 전쟁’이 숨어 있다.
선친 차명재산 이건희 명의로 전환
이번 유산문제는 지난 2008년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폭로와 연이은 특검 수사로 불거졌다. 삼성의 차명계좌가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이건희 회장 측은 “나도 몰랐다. 확인해보니 이는 선대 회장(이병철)이 남겨준 것”이라고 밝혔다. 즉 이병철 회장이 삼성 주식 형태로 숨겨둔 재산이 드러난 셈이고, 이건희 회장은 이를 2008년 12월 자신의 이름으로 실명 전환한 것이다. 여기서 불씨가 싹텄다. 이병철 회장의 재산이라면 맹희씨 등 다른 상속인들에게도 지분이 돌아가야 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이 이 불씨를 원천적으로 해소하려는 과정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사건의 핵심은 맹희씨가 낸 소장에 잘 드러나 있다. 맹희씨 측은 “이맹희의 장남 이재현은 현재 CJ주식회사를 경영하고 있는데, 이 회사 재경팀 임원은 지난해 6월 이건희 측으로부터 서명을 요구하는 문서를 받았다”고 적시했다. 아버지의 차명재산을 이건희 회장 몫으로 돌리는 데에 문제 제기를 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포기각서를 요구한 것이다. 이건희 회장 측은 일주일 후에 보낸 또다른 문서에서 “선대 회장의 유지에 따라 삼성생명 차명주식 등은 이건희 소유로 하기로 했으며, 유지에 따르지 않더라도 유류분 반환청구권의 시효소멸 등으로 이건희 소유권에 변함이 없다”고 압박했다. CJ가 이외에 신세계그룹과 한솔 등 범삼성가의 다른 그룹에서도 이 같은 포기각서를 요구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일각에서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건희 회장 측 주장대로 법적으로 유리한 상황이라면 굳이 형제들에게 포기각서를 요구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것이다. 이런 각서요구가 맹희씨의 감정을 자극해 소송이란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조계의 시선은 다르다.
국내 대형로펌의 한 변호사는 “그런 각서를 받아놓아야 100% 안전하다. 사실 모든 유산은 법률적으로 상속인들이 나눠 가져야 하는 게 원칙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변호사들의 설명으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문서를 받아놓으면 혹시라도 나중에 불만이 생겨 소송을 제기할 경우 법원에서 각하해버린다. 그러나 이런 각서가 없으면 불씨는 남을 수 있다.
이건희 생전에 문제해결 필요성
이건희 회장 입장에서는 자신이 살아있을 때 문제를 해결해둬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수 있다. 각서에 서명을 받든, 지금처럼 소장이 날아오든, 어쨌든 자신의 선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잠재워두었다가 나중에 두 집안 사촌 간의 재산 다툼으로 번질 경우 제대로 소명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특히 범삼성가의 최우선 명분이 될 창업주의 유지 문제가 불거진다면 ‘이맹희 대 이건희’의 경우엔 삼성을 물려받은 이건희 회장이 유리하지만, ‘이재현 대 이재용’의 케이스라면 장손인 이재현 회장이 유리할 수 있다.
법률적 쟁점은 선친의 숨겨진 재산이 있다는 사실을 언제 알았는지, 그 시점이다. 상속권 회복을 주장하려면 상속 불이익을 인지한 뒤 3년 이내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이맹희씨 측은 지난해 이건희 회장 측이 보낸 문건을 받고서야 이 문제를 정확히 인지했다고 주장한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건희 회장 측이 포기각서를 요구한 것은 이맹희씨 측의 즉각 반격을 유도하는 ‘도발카드’로 본다. 이 문서를 받은 순간부터는 적어도 차명재산 문제에 대해 ‘몰랐다’고 주장할 수 없다. 즉 포기각서에 서명을 하든 소송을 걸든 이건희 회장이 건재한 지금 이 시점에서 응답해달라는 적극적 요구인 셈이다.
지난해 7월 CJ 그룹 CJ제일제당센터에 이병철 창업주의 흉상이 홀로그램 형태로 등장했다. 세로 70㎝, 가로 55㎝의 홀로그램 입체 흉상은 전방과 좌우 세 방향에서 볼 수 있는 첨단 시각물이다. 바로 옆에서는 이병철 회장의 생전 모습이 담긴 영상물이 상영된다. CJ가 이병철 창업주의 유지를 받들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장자 가문의 자존심이 상한 것은 그룹의 후계구도가 뜻밖의 상황으로 전개되면서다. 1966년 삼성이 주도한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으로 이병철 당시 회장은 중앙정보부의 압박에 시달리며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이때 맹희·창희 씨 등 삼성의 장남과 차남이 내부 투서를 냈다는 얘기가 재계에 돌았다. 아버지를 경영일선에서 몰아내기 위한 아들들의 반란이라는 것이었다. 차남 창희씨가 가장 먼저 아버지 눈밖에 났고, 장남 맹희씨 또한 비슷한 의심을 받았다고 한다. 맹희씨 입장에서 이런 의심을 받는 게 상당히 억울하다고 했지만, 결국 아버지는 셋째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그룹을 동생에게 빼앗겼다고 여긴 맹희씨는 그때부터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CJ 이재현 회장은 그런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자랐다. 그 자신도 1994년 계열분리 때 삼성이 옆집에 설치한 CCTV로 집안을 감시하는 등의 불쾌한 일을 여러 번 겪었다.
소송 결과따라 삼성 지배구조 흔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번 소송의 배후에 이재현 CJ 회장이 관여돼 있을 것이란 게 재계의 시선이다. 이 사건이 CJ의 재무담당 임원의 서명문제로 불거진 데다, 소송 인지대만 20억원이 넘고 10여명의 유명 변호인단이 꾸려진 점 등을 종합해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재벌 오너 일가의 재산을 그룹 재무팀에서 관리해주는 재계 관행을 고려하면 이재용 사장 또한 이 내용을 사전에 몰랐을 리 없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결국 양측 두 세대에 걸친 구원이 창업주에 대한 상속소송의 형태로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이병철 창업주의 차명재산은 삼성생명 등의 주식으로 돼 있다. 맹희씨가 승소할 경우 다른 범삼성가의 요구가 이어질 수 있고, 삼성생명 등의 지분이 이건희 회장의 다른 형제들에게 돌아간다면 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지배구조가 흔들릴 수 있다. 맹희씨 일가로서는 삼성의 가장 약한 고리를 흔들 수 있는 셈이다. 재계 관계자는 “후계와 관련해 25년 전엔 억울하게 당했지만 이번엔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맹희씨 속내가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막판 타결 가능성은 남아 있다. CJ가가 어느 정도 명분을 취할 수 있다면 원만한 합의가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측의 치열한 법정공방과 함께 ‘삼성의 CJ 달래기’가 관전 포인트로 꼽히는 이유다.
<홍재원 경향신문 산업부 기자 jwhong@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