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자동차 주권’ 포기한 협상의 후진

한·미FTA 손익계산서, 미국입장 수용 국내 안전기준까지 양보

“양보해야 하는 규모가 더 커졌다는 부분에서는 이견이 없다” vs “7만명 고용창출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한·미 FTA 추가협상에 대한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의 엇갈린 반응이다. 12월 첫 주말에 타결된 한·미 FTA 추가협상에 대해 보수와 진보 모두를 막론하고 “자동차 부분은 기존 협상보다 후퇴했다”는 평가. 그러나 왠지 정부와 자동차업계는 환영 일색이다. 바로 없어질 예정이었던 관세가 4년 연장되면서 손해를 볼 입장이지만 아예 FTA를 안 한 것보다는 이익이라는 분위기다.

한·미 FTA 재협상 결과 자동차산업 등 국내 경제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수출차량 전용 선적 부두와 야적장에 미국 등지로 수출될 차량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그러나 자동차업계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 국민의 이익이 될지는 의문이라는 지적이다. 관세는 물론이고 환경평가와 안전기준에서도 대폭 양보한 한·미 FTA 추가협상 결과에 따라 자동차 등 산업계는 물론이고 노동시장과 소비시장 등 사회 전반적으로 큰 파장이 일 것으로 보인다.

현지공장 생산체제로 국내 고용률 하락
한·미 FTA 재협상 결과의 핵심은 우리가 자동차부문에서 관세 폐지 일정 조정, 세이프가드 도입, 안전 및 환경기준 완화 등 미국의 요구사항을 대부분 수용한 데 있다.(표 참조) 승용차와 화물자동차 등 완성차의 관세 폐지 시한을 기존 협정문보다 크게 늦춘 반면, 미국이 경쟁우위인 전기차는 폐지 시한을 앞당겼다. 한국에 수출하는 미국산 자동차에 대한 안전기준은 물론, 연비와 이산화탄소 배출 등 환경기준도 크게 완화됐다. 자동차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도입은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꼽힌다. 양국 모두 권한이 있지만 적용 대상이 미국에 수출되는 한국산 자동차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자국의 자동차산업을 보호하겠다는 미국의 입장이 철저히 관철된 재협상이라는 평가다.

특히 관세 폐지 일정을 미룬 것은 수출업계에 타격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2007년 당초 합의문과 달리 미국이 한국산 승용차에 부과하는 2.5%의 관세가 4년간 더 유지되는 만큼 당장 가격 경쟁력 부문에서 얻을 수 있는 기대가 무너진 것이다.

자동차는 우리 정부가 한·미 FTA의 최대 성과로 내세워오던 분야. 자동차업계로서는 한·미 FTA로 인한 혜택이 당초 100에서 10으로 대폭 줄었다고 해도, FTA를 하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단 낫다는 분위기이지만 “자동차분야에서 100의 이득을 얻기 위해 다른 분야에서 양보를 했는데 이제 와서 자동차마저 내주느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반면 미국차의 국내 진입은 크게 쉬어졌다. 기존 8%의 관세가 절반으로 줄어들고 향후 배기량 2000㏄ 이상 차량에 부과되는 특별소비세와 자동차세도 떨어지게 된다. 게다가 미국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빅3’가 소형차 라인업을 강화하고 있어 향후 국내 소형차 시장에서 저렴한 미국차의 돌풍을 예상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정부는 “FTA 발효 즉시 4% 관세가 사라지는 국내 자동차 부품업계는 큰 혜택을 볼 것이므로, 완성차 분야의 감소분을 충분히 만회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부와 자동차부품업계에서는 이번 관세 인하로 약 20% 정도 대미수출이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 현지 생산공장을 가동 중인 현대·기아차 등 국내 완성차업계의 수익성이 강화되고 부품 수출 중소기업의 수출 확대를 기대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환경·안전기준까지 다 내준 불공정 체결
그러나 이와는 반대되는 목소리도 있다. ‘미국 현지 생산체제로 인한 국내 고용 악화’에 대한 우려다. 현대차 대표이사를 지낸 이계안 2.1연구소 이사장은 “미국에 들어가는 국산 부품이 가격경쟁력을 갖게 되면서 미국 내에서 생산되는 차량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진다. 그러면 국내에서 생산해 수출하는 차량과 미국 내에서 생산되는 차량의 가격 차이가 점점 커지면서 한국에서 완성차를 만드는 일은 줄어들 것이고, 국내 자동차 공장의 가동률이 더 높아질 가능성은 없다”고 분석했다. 이미 미국 앨라배마의 현대자동차 공장은 5년 전 준공 당시 9만대 수준이던 생산규모가 지난해엔 21만대로 급증했다. 관세 장벽을 피하려고 완성차의 현지 생산을 늘렸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자료에 따르면 현재 미국의 국외부품 조달률은 법으로 30%를 넘을 수 없도록 규정돼 있다. 또한 쏘나타의 부품 현지조달 비율은 이미 70%에 달한다. 더 이상 국내 부품업체 수출이 늘어날 여지가 없다는 지적으로, 오히려 중소기업 위주인 국내 부품업체가 글로벌 기업에 합병되거나 구조조정에 직면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허영구 투기자본감시센터 공동대표는 “미국이 한국 자동차에 대한 관세 2.5%를 4년간 유지키로 한 것도 결국 현대·기아차에 어려운 수출보다는 미국 현지 공장 투자를 유도하려는 것”이라며 “이에 따라 울산 등 자동차 공단지역이 공동화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당초 정부는 한·미 FTA 체결로 향후 10년간 34만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발생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미국 현지에서 생산되는 일본차와 유럽차의 우회 수입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관세 차이에 따라 한국에서 미국차의 판매량이 눈에 띄게 늘어날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는 미국 수입차 회사들조차 회의적이다. 그러나 한·미 FTA를 이용해 미국 브랜드 차가 아닌, 일본 또는 유럽 브랜드로 미국 공장에서 생산한 차가 한국 시장으로 들어와 시장을 잠식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연비나 디자인 면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미국차보다는 일본차와 유럽차가 더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1~10월에 수입된 미국산 자동차 8157대 가운데 GM·포드·크라이슬러 등 미국 자동차 3사 차량은 4486대로 전체의 54%에 불과했다. 나머지 46%는 닛산·스바루·BMW·벤츠 등 일본·독일 회사가 미국 공장에서 생산해 들여온 차량이었다. 지금도 국내에 수입되는 도요타의 렉서스 같은 경우 일본에서 만든 차량이 아니라 미국에서 생산된 차량이 들어온다. 일본에서 생산되는 차량은 대부분이 우측 핸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미국에서 만든 차량에는 좌측 핸들이 장착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번 타결안에는 당초 협정문에는 없던 환경·안전기준 완화라는 특혜를 준 덕분에 국내 기업의 친환경 발걸음이 더뎌질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환경부는 최근 입안 예고한 연비·온실가스 배출 허용기준 고시안에서 국내에서 판매되는 자동차들은 2015년까지 ℓ당 17㎞ 이상 혹은 주행거리 1㎞당 140g 이하 온실가스 배출기준을 준수토록 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재협상 과정에서 한국 내 판매량이 4500대 이하인 자동차 제작사에 기준 완화를 요구했고, 양측은 결국 19%를 줄여주기로 합의했다.

이창근 민주노총 정책국장은 “이번 재협상으로 국내 자동차업체는 강화된 수준의 배출 허용가스 기준을 적용받지만 미국 업체는 그렇지 않아 역차별을 유발하게 된다”면서 “이는 한·미 양국이 무역 및 투자를 증진할 목적으로 환경보호 수준을 저하할 수 없다고 합의한 본협정문 환경조항을 무력화시킨 것으로 미국산 업체에 대한 명백한 특혜”라고 주장했다. 재협상에 따르면 미국에 공장을 갖고 있는 BMW와 벤츠, 아우디, 도요타, 혼다를 비롯한 모든 차들이 강화되는 한국 시장의 연비 규제를 피할 수 있다. 당초 “선진국보다 관련 기준이 훨씬 강화됐다”면서 환경기준 마련에 반발했던 국내 5개 완성차업체들의 저항이 예상되기도 한다.

12월 7일 김종훈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이 국회 외교통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한·미 FTA 재협상 결과에 대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2008년 쇠고기 협상 당시 함께 했던 민동석 현 외교통상부 2차관의 모습도 보인다. |서성일 기자

안전기준 특혜도 심각한 불평등 조항이라는 지적이다. 이번 재협상에서 미국 안전기준만 통과하면 한국 기준을 따를 필요가 없는 미국 자동차업체의 연간 판매 대수를 6500대에서 2만5000대로 대폭 늘렸기 때문이다. 주행거리를 마일로 표시하는 미국차가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표시기준에 따라 ㎞로 바꿔야 하는 것처럼 차 업체는 수출국의 상황에 맞춰 안전기준을 준수하는 게 상식이지만, 미국차의 안전기준을 국내에서 그대로 인정해주겠다는 뜻이다. “안전기준의 혜택으로 미국차는 각종 인증에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돼 다양한 모델을 들여올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유럽도 규제완화 요청, ‘국제적 봉’ 되나?
세이프가드 조항은 이번 재협상에서 가장 큰 오점으로 평가된다. 한국차 수출로 미국 자동차업계가 타격을 입게 되면 15년 동안 특별관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정부는 “한 번도 자동차에 대한 세이프가드가 발동된 적이 없다”며 무마하고 있지만 미국은 그동안 한국산 반도체·섬유제품의 수출이 늘어날 경우 반덤핑과 상계관세를 통해 견제해왔다.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는 “자동차산업의 미래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면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마당에 미국의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해 세이프가드와 같은 독소조항을 도입했다”고 지적했다.

미국과의 불공정한 FTA 체결은 향후 진행될 각국과의 FTA 협상·재협상에도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당장 자동차 부문에서 EU와의 협상이 이달 중 시작된다. EU 회원국인 이탈리아가 지난 10월 서명된 한·EU FTA의 자동차 협상결과에 불만을 품어왔던 차에 이번 한·미 FTA 재협상 결과는 EU에 호재가 되는 셈이다. EU 측은 한·미 FTA 재협상이 끝난 뒤 환경기준 등에 관한 협의를 한국 측에 요청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EU산 자동차의 국내 판매대수는 미국의 2배 이상이기 때문에 양보폭도 그만큼 클 것이라는 예상이다.

<조득진 기자 chodj21@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