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 제대로 선거할 수 있겠나

늦어진 선거구 획정에 당내 사정 등 공천 지연으로 유례 없는 ‘느림보 선거’

3월 11일 새누리당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은 3차 공천자를 발표하면서 “빨리 선거에 대비하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선거를 한 달 앞두고 있지만 공천자는 물론 공천 경선 후보까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빨리 서둘렀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3차 공천자 발표에서도 빠진 지역구의 후보자들은 목이 타고 있다. 한 의원실에서는 “1차로 발표날 줄 알았는데 계속 미뤄지고 있어 어떤 이유인지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의원 측은 “지역구에서는 다들 지쳐 있다”면서 “그나마 경선이라도 붙여주면 좋지만 현역 의원 컷오프(공천 배제) 대상이 될 수도 있어 오늘도 선거활동하러 나서야 하나라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 의원 측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면서 “빨리 발표라도 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대 총선은 유례 없이 ‘느림보 선거’가 되고 있다. 선거구 획정이 늦어진 데다 각 당에서 여러 사정으로 공천이 늦춰지고 있다. 여당인 새누리당은 ‘살생부 파문’ ‘여론조사 유출’ ‘윤상현 의원의 김무성 찍어내기 발언’ 등으로 친박과 비박 간 갈등이 격화되면서 공관위의 일정이 계속 뒤로 밀리고 있다. 새누리당의 한 지역구 후보 캠프가 지난 2월 초 당의 일정과 비교해 짜놓은 향후 일정을 보면 후보 면접은 2월 15일부터, 결선 후보 경선 실시는 2월 25일부터 3월 2일까지로 돼 있다. 3월 24~25일 후보자 등록을 기준으로 역산해 놓은 일정이었다.

면접은 그나마 순조롭게 진행된 편이었다. 여론조사 경선의 일자는 한없이 늦어졌다. 당초 3월 초에 실시될 것으로 점쳐졌던 결선 후보 경선 실시는 3월 11일 현재까지 한 곳에서도 이뤄지지 않았다.

4·13 총선의 새누리당 공천작업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3월 6일 부산 영도구에 출마하는 김무성 대표(왼쪽에서 두 번째) 등 예비후보들이 여의도 당사에서 공천 면접을 받고 있다. / 권호욱 선임기자

경선 지역 급속 여론조사 불가피
새누리당은 3월 4일 1차 공천 결과를 발표했고, 여기에서 경선지역으로 발표된 지역구를 대상으로 1차 경선이 3월 10일부터 실시됐다. 새누리당의 여론조사 실시 자료에 따르면 3월 10일부터 3월 16일까지 여론조사를 시행하는 것으로 돼 있다. 이번 여론조사는 안심번호로 이뤄진다. 이전 여론조사보다는 시간이 덜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휴대전화 가입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여론조사의 기준 샘플을 확보하기가 유리하다. 하지만 지지율 10% 이내 격차의 상위 2명을 대상으로 한 결선 여론조사까지 있어 전체 여론조사 기간은 19대 총선의 여론조사 공천 때보다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번 공천에서는 상향식 공천을 표방하면서 여론조사 지역이 대거 늘어났다. 당에서는 기존 여론조사 기관보다 늘려 18개 기관을 선정했다. 하지만 여론조사의 부실에 대한 우려를 접어두더라도 1차 경선→결선후보 경선→공관위 발표→최고위 추인 등의 절차를 밟다 보면 후보 등록일인 3월 24일까지의 일정이 빠듯하다.

3월 11일 새누리당이 발표한 3차 공천에서는 35개 지역이 경선 지역으로 선정됐다. 3월 11일까지도 발표되지 않은 경선 지역은 막상 발표가 나면 하루 이틀 사이에 경선 일정을 진행해야 한다. 유권자들로서는 어떤 후보가 경선에 속하는지 알 틈도 없이 여론조사가 이뤄지게 된다. 한길리서치 홍형식 소장은 “이렇게 여론조사를 하게 되면 조사의 신뢰성을 무시하고 기계적인 절차성만 갖추는 꼴이 된다”고 말했다.

새누리당의 비례대표 선정은 지역구 후보에 비하면 더욱 일정이 빠듯하다. 아직까지 비례대표를 어떻게 선발할 것인가에 대한 명쾌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무성 대표는 공개 오디션 방식으로 비례대표를 선출하겠다는 방침을 지키려고 하지만 이한구 공관위원장은 일정상 상향식 공천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표시했다. 친박 측 한 관계자는 “김 대표가 아무런 대책 없이 공개 오디션을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문재인 전 대표가 물러나고 비대위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여러 일정이 지체됐다. 문 전 대표가 밀어붙인 혁신안에 따라 현역 의원 컷오프가 이뤄지고 이에 반발하면서 새로운 절차가 필요했다. 하지만 공관위가 순조롭게 운영되면서 새누리당보다는 비교적 공천 발표가 앞섰다. 3월 11일 현재 더민주가 발표한 공천은 전체 253개 지역구 중 76.3%인 193곳(전략공천 5곳 포함)이다.

하지만 더민주의 공천을 받더라도 야권은 또하나의 일정이 남아 있다. 야권연대 수순이다. 더민주에서 단수 추천을 받은 수도권의 한 의원 측은 “당에서는 공천을 받았지만 국민의당과의 야권연대도 불투명하고, 정의당이 요구하는 야권연대 지역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 의원 측은 “그렇다고 야권연대를 하지 않고 새누리당과 일여다야로 대결하는 것은 힘들기 때문에 빨리 모든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길 바랄 뿐”이라고 덧붙였다.

야당은 야권연대라는 또 하나의 변수
총선을 앞두고 창당한 국민의당은 다른 당보다 일정이 더욱 촉박하다. 공관위에서 공천 일정을 진행하고 있지만 야권연대를 놓고 ‘3두 체제’ 중 천정배 공동대표와 김한길 선대위원장이 안철수 상임대표와 맞서고 있다. 3월 11일 김 위원장이 선대위원장직을 내놓고 천 대표가 당무에서 손을 떼면서 국민의당의 선거 일정은 물론 야권연대 일정이 모두 불투명해졌다.

총선이 한 달 앞으로 코앞에 다가왔지만 해당 지역구에서 누가 각 정당의 후보로 나오는지 알지 못하는 지역구가 부지기수다. 새누리당은 허겁지겁 이뤄지는 경선 여론조사 때문에 어떤 후보가 지역구 후보로서 적합한지를 헤아려 볼 수 있는 시간이 유권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더민주 역시 경선 여론조사는 안심번호 국민경선제로 이뤄지면서 이전에 당원 대상 공천 여론조사에서 사전에 실시한 정견 발표가 없어지게 됐다. 여론조사에서 단 2개의 이력을 통해 후보를 선정해야 한다. 말 그대로 ‘깜깜이 선거’가 진행되고 있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은 “있을 수 없는 선거 일정”이라면서 “이런 일정은 선거를 선거로 보는 행위가 아니라 그냥 자기 측 사람을 뽑는 안하무인의 행태”라고 비판했다.

서둘러 하는 선거 일정의 혜택은 인지도가 높은 현역 의원에게 돌아가고 있다. 정치 신인들은 사실상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홍 소장은 “국민 여론은 현역 의원을 물갈이하라고 하는데, 늦어진 선거일정으로 인해 정치 신인들은 전혀 부각될 틈이 없기 때문에 죽을 쑤게 된다”고 말했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 대표는 “총선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각 정당에서 후보자를 발표하지 않는 것은 유권자의 선택 기회를 뺏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리서치뷰 안일원 대표는 “이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하면 억울한 후보가 속출하게 마련”이라면서 “이들 후보는 재심을 요청하고 심사를 받아 구제받을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하게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안 대표는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현상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선거구 획정 지연에다 경선 여론조사 지역 확대, 당내 분란 등으로 선거일정 지연이 최악”이라고 말했다.

<윤호우 선임기자 hou@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