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퐁 민원’에 민원인만 골탕

3회 이상 이송 민원 지난해 1만5천건… 부처 간 떠넘기기 갈수록 늘어

법원행정처 신청(2014.5.18.)→여성가족부(5.21.)→법무부(5.23.)→미래창조과학부(5.23.)→방송통신위원회(5.27.)→한국정보통신진흥협회(5.28.)→국민권익위원회(5.30.)→여성가족부(6.5.)→법무부(6.5.)→금융위원회(6.5.)→금융감독원(6.5.)→법무부 접수(6.9.)

한 민원인이 성인 연령 기준 관련 민원을 제기했으나 중앙행정기관이 자기 기관의 민원이 아니라며 무려 11회나 다른 부처로 떠넘긴 사례다. 이 민원은 신청한 지 22일 만에 접수됐다.

1995년 12월생인 민원인은 지난해 5월 정부가 운영하고 있는 통합 온라인 민원창구인 국민신문고(국민참여 포털시스템)에 “실제 나이가 20세인데 성인 연령 판단기준을 월 단위로 계산해 만 18세가 된다. 성인 기준을 월 단위로 계산하지 말고 연도 단위로 바꿔 달라”는 민원을 법원행정처에 냈다.

결국 이 민원은 11개 부처를 돌고 돌아 법무부가 답변을 했다.

정부세종청사전경. | 경향신문 자료

온라인 접수 허용 이후 신청 급증
법무부는 “미성년과 성년의 기준은 민법에서 규정하는 사항이며, 학교 입학의 경우는 같은 나이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2008년 이전 취학연령 기준을 3월 1일로 정한 데서 유래된 것으로, 2009년부터 1∼12월생 아동이 같은 학년으로 입학하도록 제도가 개선되었다”고 회신했다.

하지만 법부무의 답변은 민원인이 원하는 답변이 아니었다. 성년 기준을 월 단위가 아닌 연도 단위로 바꿔달라는 질문에 대해 아동의 초등학교 취학연령에 대한 설명이 답변의 대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민원이 우편, 전화 등 오프라인으로뿐만 아니라 온라인(국민신문고)을 통해 손쉽게 접수가 가능해짐에 따라 최근 민원 신청 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지난 2012년에 120여만건, 2013년 130여만건, 2014년 170여만건의 민원이 국민신문고를 통해 접수됐다. 하지만 민원이 양적으로 증가하는 데도 불구하고 민원에 대한 답변의 질이 떨어지거나 ‘떠넘기기’가 관행적으로 발생하고 있어 민원인들의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국민신문고를 담당하는 주무부처인 국민권익위원회가 지난해 7월 공공기관의 민원 처리에 대한 국민 인식 조사를 실시한 결과, 정부 각 부처의 민원 처리 결과에 대해 응답자의 51.3%가 ‘만족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만족한다’는 응답은 35.6%에 그쳤다.

한 민원인은 작년 2월 인천의 모 병원에서 어깨 인대 파열 치료를 위한 수술을 받고 병원의 추천을 받아 어깨 고정을 위한 보조기기를 구입했다. 그러나 10만원이라는 가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업체에 문의해 보니 노동부 고시인 산재수가표가 가격 산정의 근거라고 했다. 민원인은 산재수가표와 납품업체 등의 적정성에 대한 조사와 개선을 해달라고 공정거래위원회에 요청했다.

이 민원은 공정위에서 출발해 보건복지부, 고용노동부, 근로복지공단, 공정위, 근로복지공단을 거쳐 공정위로 다시 왔다.

하지만 공정위의 답변은 군색했다.

“공정거래법은 사업자의 경쟁질서 위반행위 또는 불공정 거래행위를 규제하는 법으로, 법령에 열거된 행위에 해당되지 않는 경우는 공정위가 처리할 수 없다. 또한 사적인 계약관계 등은 민사적 문제로 법원의 판단을 받아야 할 사항이며, 납품단가나 업체 선정에서 비리 등의 사실이 있다면 수사기관에 수사를 의뢰하라.”

민원인은 공정위가 보조기기 가격이 타당한지를 조사해서 답변해주기를 기대했으나 만족스런 답변은 아니었다.

이에 대해 공정위 관계자는 “위와 같은 민원이 가끔 공정위로 접수되고 있다”며 “하지만 그런 민원은 공정위의 업무범위를 벗어나는 것으로 답변이 어려울 때가 있다”고 해명했다.

또한 민원인들이 한 부처에 민원을 제기하면 소관사항이 아니라며 다른 부처로 이송하는 이른바 ‘떠넘기기 민원’도 시간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권익위가 최근 국회 정무위원회 김정훈 의원(새누리당)에게 제출한 ‘2012∼2014년 국민신문고를 통해 중앙행정기관이 처리한 민원의 이송현황’에 따르면 3회 이상 이송된 민원은 2012년 8596건, 2013년 1만1490건, 2014년 1만5391건으로 나타났다.

국민·정부 소통 저해하는 요소로
각 부처간 5회 이상 이송된 ‘핑퐁 민원’도 2012년 1444건, 2013년 1936건, 2014년 2969건으로 급증하고 있다.

권익위는 최초 접수된 기관에서 3회 이상 다른 부서로 보내진 민원을 ‘떠넘기기 민원’으로 간주하고 있다. 3회 이상 이송된 민원은 각 부처에서 답변을 회피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떠넘기기 민원’은 최초로 민원을 접수한 부처가 민원에 대해 답하기 곤혹스럽거나 다른 부처와 조금이라도 연관된 민원이라고 생각하면 이송해 버림으로써 주로 발생한다. 또한 국민신문고가 온라인 상에서 통합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각 부처에서 클릭 한 번으로 이송이 쉬운 것도 잦은 민원 떠넘기기에 한몫하고 있다.

지난 2013년 10월 미래창조과학부는 민원인으로부터 “인터넷 포털에 불법폐차 사업자 전화번호가 난무하여 대전광역시 관내 적법한 자동차 폐차 재활용 사업장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영업권이 침해받고 있으니,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통신회사에 대한 행정지도 및 관련 규정 개선 등을 통해 불법행위를 근절시켜 달라”는 민원을 접수했다. 하지만 미래부는 이를 국토교통부로 이송했다. 국토부는 다시 미래부에 보냈고, 미래부는 이를 방송통신위원회에 보냈다. 이후에도 방송통신위와 미래부는 두 차례의 주고받기를 반복했다. 결국 민원은 최초에 신청된 미래부에서 접수했다.

이 같은 ‘떠넘기기 민원’은 민원 표류의 원인이 되고 국민과 정부의 소통을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 특히 장기적인 민원 처리 지연은 정부의 불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김정훈 의원은 “행정기관간 ‘민원 떠넘기기’로 민원이 장기간 표류되고 있어 민원을 제기한 국민들의 불편과 불신이 발생하고 있다”며 “민원 처리기관간에 이견이 발생할 경우 직접 처리기관을 지정·조정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가 정부 부처에 필요하다”고 말했다.

권익위도 ‘핑퐁 민원’ 방지를 올해의 중점사업으로 삼고 있다. 국민신문고를 상시적으로 감시해 민원이 세 번째 이송될 때 권익위가 직접 처리기관을 조정·확정할 예정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권익위는 ‘핑퐁 민원’의 접수까지 소요되는 기간을 기존의 4.7일에서 2.5일 이내로 줄인다는 계획이다.

권익위의 한 관계자는 “각 부처간에 이송이 잦은 민원에 대해서 만약 누군가가 조정하지 않으면 한없이 표류할 수도 있다”며 “민원인이 민원을 접수하면 법정기한인 14일 안에 받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