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지보다 가벼운 약속 ‘이번엔 쪽지예산 없다’

여야 지도부 ‘상임위 거치지 않는 증액 없다’ 공언 속 국토위 등에 예산요청

봇물… 작년엔 최경환·서청원 예산 논란, 올핸 ‘이정현 예산’에 이목집중

과연 쪽지예산은 내년도 예산 심의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최근 여야 지도부가 쪽지예산을 받지 않겠다고 공언하면서 의원들의 손길이 바빠졌다. 해당 상임위를 거치지 않는 예산을 예결위에서 증액하거나 새로운 항목으로 끼워넣지 않겠다고 함에 따라 각각 해당 상임위 의원에게 부탁해 미리 구두질의를 하거나 서면질의를 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요청이 가장 많이 폭주한 곳은 SOC예산을 다루는 국토교통위다. 지역 국회의원의 지역구 예산과 직결되는 사업이 많기 때문이다. 국토위는 기획재정부가 책정한 국토부 예산에서 3조3570억원을 증액시켜 예결위에 올렸다. 국토위 의원들이 인근 지역구 의원들의 요청과 가까운 의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반영한 결과다. 국토위의 한 의원실에서는 “많이 신청한 의원의 경우 7~15건 정도이고 보통 한 의원당 3~4건 정도 들어왔다”고 말했다. 한 의원은 “국토위에서 3조원 넘는 예산을 늘렸지만 이게 모두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의원들이 자신들이 지역구에 이렇게 노력했다고 보여주는 ‘의례적인 절차’이자, 이런 일을 대신 해줬다는 ‘동료 의원에 대한 예의’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정부질의에 출석한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과 대화하고 있다. | 권호욱 선임기자

쪽지예산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쪽지가 아닌 A4용지 형식의 서면 요청이고, 카톡 또는 문자메시지 형식도 있다. 이를 쪽지예산에 빗대 ‘카톡예산’ ‘문자예산’ ‘A4예산’이라는 별칭이 생겨났다. 한 상임위에서는 A4형식 외에는 접수하지 않는다는 내부 방침을 정하기도 했다.

“예산심의는 국회권한, ‘악’ 규정 지나쳐”
연말 때마다 비판의 대상이 되는 ‘쪽지예산’은 과연 어디까지가 ‘쪽지예산’인지에 대한 논란의 불씨를 안고 있다. 넓은 의미의 쪽지예산과 좁은 의미의 쪽지예산은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의 쪽지예산은 해당 부처 예산에서 없던 항목을 국회 예산 승인 과정에서 증액하거나 새롭게 끼워넣은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의 쪽지예산에 대한 비판은 찬반 논란이 있다.

예산을 다루는 국회가 정부의 예산안을 손대는 것은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고, 해당부처에서 꼼꼼히 들여다볼 수 없는 것을 지역구 의원이 보완하는 긍정적 효과도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예결위 야당 간사였던 최재천 의원은 “쪽지예산이라는 용어는 부정적인 낙인 용어”라면서 “지역구 의원들은 엄연히 지역 대표성을 갖고 투표로 선출되는데, 지역구 예산 확보를 무조건 터부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한 야당 관계자는 “예산 심의는 국회의 고유 권한”이라며 “정부의 예산안은 선이고 국회의 예산 수정은 악이라는 반(反)정치 프레임 때문에 쪽지예산 자체를 부정적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쪽지예산이라고 한다면 엄밀하게 좁은 의미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쪽지’라는 말은 원래 예결위에서도 특히 마지막 과정인 예산안조정소위의 결정 과정에서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이들 예산안조정소위 의원에게 꼭 필요한 예산을 한 줄 메모로 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쪽지예산의 ‘진수’는 그동안 해당 부처와 해당 상임위에서 전혀 논의조차 안 된 사업을 끼워넣어 통과시키는 것이다. 특히 정권 실세들은 구차하게 부처나 해당 상임위에 로비해서 이러쿵저러쿵 창피를 당하느니, 예결위 예산안조정소위에 끼어들어 단박에 통과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비록 중앙 언론에서 일회성 비판을 받을지언정 지역 언론에서는 대서특필되고 지역구 주민에게는 찬사의 대상이 됐다. 최재천 의원은 “쪽지예산은 여당의 실세 정치인이 예산의 모든 절차를 무시하면서 사전 검증을 전혀 거치지 않은 채 통과시키는 예산으로 좁혀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 의원은 또 “이런 과정에서 특히 지역 간 균형을 무너뜨리는 예산이 편성되는 것은 철저히 비판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쪽지예산은 없다’고 역시 공언했던 지난해에도 쪽지예산 논란은 어김없었다. ‘최경환 예산’과 ‘서청원 예산’이었다. 예결위 막판에 끼어든 ‘최경환 예산’은 ‘대구도시철도 1호선 하양 연장사업’ 예산이었다. 하양은 최경환 부총리(당시 여당 원내대표)의 지역구(경산·청도)다. 이 사업이 지난해 12월 24일 겨우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함에 따라 이 예산은 예결위에 불쑥 튀어나왔다. 하지만 해당 상임위인 국토위의 야당 위원장이 문제를 삼자, 예결위에서는 신규 예산 반영을 포기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 대구도시철도 사업에다 예결위가 50억원을 증액했고 이 때문에 이것이 결국 ‘최경환 예산’이 아니냐는 의혹을 낳았다. 당시 여당 원내대변인은 “이 50억원 증액은 최 원내대표의 지역구 사업이 아닌 계속 사업의 예산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해명했다.

한 해 2조 규모… 실세들은 정부서 미리 챙겨
내년도 예산에서 ‘최경환 예산’인 하양 연장사업은 또다시 시동을 걸었다. 국토부 요구안은 10억원이었으나 기재부의 조정안은 30억원으로 20억원이 늘어났다. 한 야당 관계자는 “보통 부처의 요구안을 기재부가 깎는데 부처 요구안을 증액시킨 것은 드문 케이스”라고 말했다. 기재부에서 해당 장관의 지역구 예산을 늘려줬다는 점에서 ‘최경환 예산’의 위력을 볼 수 있다.

‘서청원 예산’은 신분당선 전철 봉담~향남선 연장을 위한 사전타당성 조사 예산인 3억원이다. 지난해 보궐선거에서 이 공약을 내건 서청원 의원은 지역 언론인 ‘경기IN’에서 “당초 정부 예산안에는 없던 것을 관련부처와 국회 예결위를 설득해 관련 예산을 확보했다”고 자찬했다.

내년도 예산안은 ‘예산폭탄’을 예고한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의 ‘이정현 예산’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이정현 예산’은 해당 상임위인 산업위에 다수 포함돼 있다. 이 의원은 광양만권의 기능성 화학소재 클러스터 구축(신규사업)에 25억원 반영을 요청했다. 순천해룡산업단지의 친환경연료응용기술연구기반구축사업(신규)에는 110억원의 반영을 요청했다. 광양만권 미래형 소재산업 육성을 추진하기 위한 신규 사업인 하이퍼플라스틱 소재 연구기반 구축사업에는 20억원의 예산 반영을 요청했다. 이밖에도 지역구 예산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정현 예산’은 산업위뿐만 아니라 다른 상임위에서도 착착 예산 승인 절차를 밟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인 예가 문화부 예산에서 순천 선비문화체험관 건립으로 9억원을 배정한 것이다. 당초 문화부의 요구안은 4억원이었으나 기재부에서 9억원을 반영해줬다. 유사 사업을 모두 포함한 종교문화시설 건립 예산의 문화부 요구안이 138억원이었는데, 기재부에서 94억원만 반영한 것을 감안하면 ‘이정현 예산’의 순증은 뜻밖의 케이스로 받아들일 만하다. 이 예산은 국회 교육문화위에서 다시 4억원으로 감액해 예결위로 넘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이정현 예산’은 이 의원이 예결위원으로 활동하게 됨에 따라 마지막까지 이 의원의 손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국회에서는 쪽지예산의 규모가 넉넉잡아 2조원 정도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기재부에서도 이미 이 정도의 여유 예산을 갖고 운용한다는 것이 한 여당 관계자의 귀띔이다. 이 관계자는 “기재부에서는 보통 예결위원들에게 각각 20억원 정도 선에서 증액을 용인해준다”고 말했다. 다른 여권 관계자는 “의장단과 예결위원장, 예결위 양당 간사, 기획재정위원장, 대선 후보, 양당 대표, 양당 정책위 의장 등의 지역구에 대해서는 정부에서 따로 요청 예산을 관리해 알아서 증액해준다”고 말했다.

<윤호우 선임기자 hou@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