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한다]‘설거지론’이 외면하는 폭력

최근 남초 커뮤니티에서 이른바 ‘설거지론’이 등장했다. 연애 경험이 적으며 스펙이 좋거나 소득이 높은 남성이 20대 시기에 잘생긴 남자들과 연애를 즐기던 여성과 결혼하는 것은 이미 ‘더러워진 식기’를 설거지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결혼해봤자 사랑받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ATM기 취급’이나 받는다며 조롱한다. 물론 이런 나르시시즘적 논리는 여성을 대상화할 뿐만 아니라 ‘그릇’에 비유한다는 사실만으로 보편적 담론의 지위를 얻기 어렵다. 그러나 동시에 이를 통해 남성 정체성이 어떤 방식으로 구축되고 있는지 확인할 수도 있다.

설거지론자가 비난하는 대상은 ‘퐁퐁이’, 즉 부인에게 소액의 용돈을 받고 취미생활이 제약돼 결혼생활 자체가 전혀 행복하지 않은 유부남이다. 수다한 갈등과 상호이해를 거치며 나름의 삶을 살고 있는 기혼 남성이나, 설거지론에 동의하지 않는 미혼 남성·여성에겐 이런 주장이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여성에게만 혼전순결 잣대를 들이대며 ‘그릇’에 비유하는 것에서부터 비뚤어진 시각이다. 스펙, 학벌, 외모를 떠나 그런 편협한 시각으로 타인을 대하는 사람이라면 친구로도 알고 지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익명으로 떠드는 위악이 비겁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여초 커뮤니티에서는 설거지론이 ‘도태남(연애 시장에서 도태된 남성들을 지칭)’의 정신승리에 불과하다고 보는 시선이 지배적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실태조사(2018년)를 보면, 20~44세 미혼 남성의 74.2%가 연애를 하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지난해 인구보건복지협회가 30대 미혼청년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성공하거나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을 경우 결혼과 비혼 중 무엇을 선택할지’를 묻자 남성 76.8%가 결혼을 택한 반면, 여성은 67.4%가 비혼을 택했다. 즉 객관적인 데이터는 설거지론자들의 논리를 전혀 반영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n중’의 위기에 살고 있다. 기후, 직장 내 성희롱, 군대 폭력, 노동안전, 갑질, 정치, 불평등, 인종과 전쟁… 어느 하나 위기가 아닌 것이 없다. 우리 모두 제각각 사회적 위기를 마주하고 있다. 평범한 사람이 혼인 이전에 통과하는 지독한 경쟁이나, 결혼 이후 마주하는 무수한 사회적 비용과 주거, 육아, 가계부채 같은 고난은 여성 혹은 남성이 타자에게 일방적으로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시스템의 이윤을 독식하는 이들이 노동자·영세자영업자에게 일한 만큼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n중의 위기를 무시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n중의 위기 앞에 선 청년남성이 스스로를 피해자로 규정해 “박탈된 삶을 살아간다”며 자기연민을 보이고, 온라인 전쟁을 통해 끊임없이 적을 생산하는 트롤 행위는 자신의 위기에 제대로 대응할 방책이 될 수 없다. 조롱과 정신승리보다는 구조적 폭력을 있는 그대로 인식 또는 저항하는 것이 보다 현명한 생존방식이 아닐까. 얼마 전 개봉한 SF영화 <듄>에 나오는 구절이 떠오른다.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움은 정신을 죽이고, 세계를 소멸시키는 작은 죽음이다.”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