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스포츠 국가주의” 흘러간 유행가

선수들 ‘국위선양’ 부담 덜해… 국민도 메달보다 최선에 감동

한때 스포츠는 ‘국가사업’이었다.
1966년 6월 25일 장충체육관. 초여름 경기장은 7000여 관중이 뿜어내는 열기로 후끈했다. 당시 동양챔피언 김기수가 WBA 미들급 세계타이틀에 도전하는 날이었다. 상대는 당시 세계 챔피언이었던 이탈리아 선수 니노 벤베누티. 그 누구도 경기 중에는 쓰러지지 않았다. 승패를 가르는 일은 심판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마침내 주심이 김기수의 손을 들었다. 한국 최초의 세계 챔피언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남자 쇼트트랙 대표팀이 지난 2월 27일 밴쿠버 퍼시픽 콜리시움에서 열린 5000m 계주에서 은메달을 딴 곽윤기 선수가 시상대에서 ‘시건방춤’을 추고 있다. 과거의 엄숙하던 모습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연합뉴스

김기수는 관중의 환호에 답하고는 곧장 귀빈석으로 올라갔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귀빈석에서 그를 맞았다. 박 대통령은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김기수는 대답 대신 눈물만 흘렸다. 박 대통령은 챔피언 벨트를 직접 김기수의 허리에 감아줬다.

사정은 이랬다. 김기수는 산업화 시기 ‘헝그리 복서’의 전형이었다. 가난과 배고픔을 스파링 상대 삼아 운동했다. 제대로 된 체육관도 없었다. 1965년 그가 동양챔피언이 됐을 때 박 대통령은 포항제철을 맡아 정신이 없던 박태준에게 “김기수란 친구가 굉장히 세다는데 우리 국민의 사기 진작을 위해 세계챔피언도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전격적인 후원을 하라는 지시였다. 머뭇거리는 기업가에게 대통령이 말했다. “여보게, 그것도 국가사업이야.”

운동선수와 국민 전체의 동일시를 통한 국민적 자긍심의 고양, 국가와 기업의 전격적인 후원, 스포츠 성적을 통한 권력의 정당성 획득이란 3박자를 고루 갖췄다. 말 그대로 국가사업이었던 셈이다.

과거엔 경기성적과 국가우월성 동일
그로부터 20년 뒤에는 어땠을까. 1986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선수들은 금메달 93개를 가져왔다. 금메달을 가장 많이 차지한 중국과 불과 1개 차이였다. 온 나라가 들썩였다. 그해 11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기업인들과의 청와대 만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우리 국민은 위대하다는 걸 대통령 하면서 실감했는데 입증할 기회가 없었다. 아시안게임이 그것을 입증하는 기회가 됐다.” 그 무렵 고등학교 체육 교과서에는 이런 내용도 들어 있었다. “이 올림픽 대회(88년 서울 올림픽)의 개최는 우리 민족의 우월성과 우리나라의 발전 상황을 국제사회에 내놓는 새로운 계기가 되는 셈이다.” 운동선수들이 국제경기에서 거둔 성과를 국가와 민족의 ‘우월성’과 동일시하는 인식 구도가 여전했던 것이다. 기영노 스포츠 평론가는 “우리나라 스포츠의 국가주의는 박정희 정권을 지나 전두환 정권에 이르면서 점점 강도가 세졌다. 스포츠가 정치에 이용됐다”고 설명했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 선수들은 달랐다. 이들에게 눈물은 흘러간 유행가 가사였다. 남자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 금메달을 딴 모태범은 “경기를 즐겼다” “울고 싶어도 눈물이 안 난다”고 말했다. 이상화는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는 금메달을 땄지만 1000m에서는 23위를 했다. 그러나 지고도 웃었다. 1000m는 주력 종목이 아니라면서 “그래도 왕베이싱(24위)보다는 잘하지 않았나”라고 농담까지 했다. 쇼트트랙 2관왕 이정수는 시상식을 마치고 관중석으로 꽃다발을 던졌다. 남자 5000m 계주 은메달을 딴 곽윤기는 시상대에서 아예 춤을 췄다. 국가와 민족의 강박에 짓눌리던 선수들의 모습을 더는 찾아보기 어렵다.

기영노 평론가는 “과거에는 선수들이 감독 눈치를 보느라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다. 지금 세대는 개성을 중시하는 성향이 강해 많이 자유로워졌다”면서 “한국 민주주의가 성숙하면서 스포츠가 본래 모습을 찾고 있다”고 평가했다. 과거 한국 스포츠를 국가 이익이나 민족적 자긍심 같은 집단적 가치에 묶어 놓았던 족쇄가 풀렸다는 진단이다.

변화의 조짐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부터 감지됐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던 강초현은 여자 공기총에서 은메달을 땄다. 그는 아주 짧게 허탈한 표정을 지었을 뿐 울지 않았다. 시상대에서는 활짝 웃었다. ‘통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은메달 수상자는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시상식 후 그가 던진 말은 스포츠 1등주의에 함몰된 한국인의 의식에 총탄처럼 날아와 박혔다.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고 해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다.”

강초현의 말과 행동이 일으킨 파문은 더 넓은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자 역도 이배영은 메달은커녕 역기를 제대로 들어올리지도 못했다. 그러나 경기 뒤 그는 “성적은 꼴찌지만 나는 최선을 다했기에 꼴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당시 그에게 붙은 별명은 ‘미스터 스마일’이었다. 1등 한 선수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박태환은 가슴에 손을 얹는 대신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배드민턴 혼합복식에서 금메달을 딴 이용대는 승리를 확정한 뒤 윙크를 날렸다. 시민들의 반응도 덩달아 달라졌다. 승패보다는 스포츠 자체가 만들어 내는 드라마를 즐겼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냈다. 밴쿠버 올림픽에서는 이런 흐름이 더욱 완연했다.

“금메달 못따도 고개 숙이지 않는다”
정윤수 문화 평론가는 이러한 변화의 원인을 세 가지 측면에서 분석했다. “선수도 세대 교체가 됐지만 지도자의 세대 구성도 달라졌다. 메달에 목을 매는 국위선양이라는 이념을 체화하고 있던 지도자가 많이 물러났다. 또 예전에는 스포츠 이외에 즐길거리가 없었지만 지금은 대중이 욕망을 투사할 수 있는 대상의 폭이 넓어졌다. 여기에 우리 사회 민주화의 진전에 따라 가치관이 다원화된 것도 변화를 끌어낸 동력이다.” 세대 구성의 변화, 대중문화의 확산, 정치 지형의 변동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설명이다. 이제 한국에서 스포츠 국가주의는 희미한 흔적으로만 남게 된 걸까.

정희준 동아대 교수(스포츠사회학)는 “선수들에게선 국가주의가 탈색됐다. 그러나 정치와 미디어가 스포츠를 국가주의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행태는 이전보다 완화되긴 했어도 사라졌다고 보긴 어렵다”고 평가했다. 그는 “방송은 아직도 지나치다. 해설자가 노골적으로 ‘국민 여러분’을 외치고, 여전히 금메달 숫자로 등수를 매기려 한다. 정치의 경우 이동관 청와대 홍보수석은 ‘올림픽 기적은 MB 국정철학의 결실’이라고 하지 않았나”라고 꼬집었다.

정윤수 문화평론가는 “동계 올림픽의 경우 어린 선수들이 기량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종목이 중심이어서 도드라져 보인 점도 있다”면서 “선수들이 수업을 받을 권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학교체육법안이 통과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교체육법안은 운동선수가 일정 학력 수준에 못 미칠 경우 대회 출전을 제한하고 학교체육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도록 한다는 내용으로, 올해 2월 임시국회에서 부결됐다.

한국갤럽이 지난 2월 28일 시민들을 상대로 동계올림픽 MVP를 조사한 전화설문에서 은메달만 2개를 딴 성시백은 2관왕 이정수보다 더 높은 지지를 받았다. 한편 여자 피켜스케이팅에서 13위를 한 곽민정은 금메달리스트가 모인 선수단 귀국 기자회견에서 1시간 내내 서 있기만 했다. 2010년 한국 스포츠 문화는 이 두 풍경 사이에 서 있다.

참고자료: <스포츠 코리아 판타지>(정희준·개마고원),
<한국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3>(강준만·인물과사상사)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