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 피살로 시험대 오른 북한과 동남아

40여년 간 이어져온 북한과 동남아 간의 관계는 시험대에 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말레이시아를 무대로, 인도네시아, 베트남 국민까지 이번 피살 사건에 동원한 정황이 포착되면서 북한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 피살사건으로 북한과 동남아 국가들의 관계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북한이 배후로 지목되고 있는 이번 사건이 왜 말레이시아에서 발생했는지, 북한은 동남아 국가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등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 사건이 북한과 말레이시아 간 외교 갈등까지 야기하면서, 40년 넘게 유지됐던 북한과 동남아 국가들의 우호관계도 시험대에 올랐다.

말레이시아는 북한과 친밀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다. 1971년 북한과 통상관계를 시작한 데 이어 1973년 수교했다. 1973년 12월 쿠알라룸푸르에 북한대사관이, 2004년 3월에는 평양에 말레이시아대사관이 개설됐다. 지금은 중단됐지만 2011년 평양에 직항로를 개설하기도 했다. 말레이시아는 북한과 입국에 비자가 필요가 없는 무비자협정을 맺고 있는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북한 국적자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말레이시아의 상황을 이번 피살사건의 배경 중 하나로 지목하고 있다.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이후 이복동생인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을 피해 해외를 떠돌던 김정남이 말레이시아를 오간 것도 자유로운 출입국이 가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네덜란드 라이덴대학의 북한 연구자인 크리스토퍼 그린은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이동이 자유롭다 보니 북한이 사업하는 데 있어 말레이시아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칼리드 아부 바카르 말레이시아 경찰청장이 2월 22일 쿠알라룸푸르 부킷아만 지역에 위치한 경찰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정남 피살사건에 사실상 북한당국이 개입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말레이는 북한과 유일한 무비자협정국

말레이시아는 북·미 간 비공식 접촉 장소로도 활용된다. 지난해 10월 로버트 갈루치 전 국무부 북핵 특사가 한성렬 북한 외무성 미국국장과 만나 북핵문제를 논의한 곳도 말레이시아다.

양국 간 교역도 활발하다. 북한은 고무·야자유 등을, 말레이시아는 철광석·아연 등을 수입한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양국 간 교역량은 2015년 기준 2270만 링깃(약 58억원)이다. 이로 인해 말레이시아 내 북한 거주자는 수백 명에 이르는 것으로 관측된다. 말레이시아가 지난해 8월 유엔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사라왁주 건설·탄광산업 현장에서 북한 노동자 80명이 근무했다.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대사관은 말레이시아에 평양 고려식당을 운영 중이다. 북한은 핵무기 개발에 따른 국제 제재로 수출길이 막히자 관광산업을 새로운 외화 획득원으로 정하고 말레이시아에 사무소를 차려 동남아와 인도 관광객 유치에 나서기도 했다.

말레이시아뿐만 아니라 동남아는 북한과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맺어왔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에 속한 동남아 10개국은 모두 한국과 북한의 동시 수교 국가들이다. 평양과 동남아 국가 수도에 대사관을 상호 설치하고 있는 나라는 말레이시아를 비롯, 라오스, 베트남,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5개국이다.

동남아에는 과거 공산주의·군사독재 시절부터 이어져온 북한과의 특수관계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국가들이 적지 않다. 공산국가인 라오스와 베트남은 북한 노동당과 과거부터 내려오는 당대 당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베트남은 1950년 아세안 국가 중 처음으로 북한과 수교했다.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 등 말레이시아 연립여당 소속 당원들이 2월 23일 쿠알라룸푸르 부킷다만사라에 있는 북한대사관 앞에서 ‘김치를 만들지, 김(정남)을 죽이지 말라’ 등이 적힌 팻말들을 들고 항의시위를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과거 공산국가였던 캄보디아도 북한과의 우호관계가 여전하다. 북한 최고 예술단체 만수대창작사는 2015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사원 옆에 앙코르 파노라마 박물관을 건설해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공산화 이전 시아누크 국왕은 김일성 북한 주석과 깊은 친분을 맺어 북한 경호원을 채용하기도 했다. 미얀마 역시 과거 군사독재 시절 북한과 군사협력관계를 꾸준히 유지해 왔다. 북한은 미얀마 군부정권에 재래식 무기를 팔며 외화를 챙겼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동남아 국가들이 비동맹 노선을 취해온 점도 북한과 유대관계가 깊었던 배경이다. 비동맹 외교를 주창했던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과 각별한 사이였다. 수카르노의 장녀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전 대통령은 2002년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는 등 남북한의 가교 역할을 자임하기도 했다.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의장도 지난해 아시아·아프리카정상회의(반둥회의) 60주년을 맞아 인도네시아를 찾는 등 수차례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

싱가포르와 태국은 북한의 주요 무역 대상국이다. 싱가포르에는 북한 선박이 자주 들른다. 이로 인해 대북제재를 우회하는 불법거래가 이뤄지기도 한다. 싱가포르에 있는 북한회사 진포해운은 2013년 쿠바에서 불법무기를 북한으로 운송하다 적발된 청천강호의 파나마 운하 통과 대금을 지원한 혐의로 지난해 벌금 18만 싱가포르달러(약 1억5000만원)를 부과받았다.

동남아는 북한에겐 ‘숨 쉴 수 있는 곳’

북한과 동남아 간 우호관계는 1960~70년대의 외교환경도 한몫을 했다. 북한은 남한과의 정통성 경쟁 차원에서 동남아 지역에서 활발한 외교전을 펼쳤다. 당시 형성된 인적 네트워크가 아직도 남아 있다. 이 때문에 대북제재로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던 북한에 동남아 지역은 대북제재를 피해 외화벌이를 할 수 있는 지역이라고 FT는 분석했다.

이번 김정남 피살사건을 계기로 40여년간 이어져온 북한과 동남아 간의 관계는 시험대에 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말레이시아를 무대로, 인도네시아, 베트남 국민까지 이번 피살사건에 동원한 정황이 포착되면서 북한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산정책연구원의 이재현 선임연구원은 ‘김정남 피살을 계기로 동남아에서 북한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기고문에서 “이번 사건으로 치안이 좋고 국내 정치가 안정적이라는 말레이시아는 국가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었다”면서 “여성 용의자로 자국민이 연루된 베트남과 인도네시아도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이미 북한과 말레이시아의 관계는 갈등으로 치닫고 있다. 북한이 김정남의 부검을 막으려 하고, 말레이 경찰의 수사 결과를 전면 부인하면서 말레이시아 당국을 맹비난하자 말레이시아 측도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나집 라작 말레이 총리는 2월 21일 “북한대사의 발언은 외교적으로 무례했다”고 말했다. 말레이 정부는 북한에 대한 항의 표시로 모하맛 나잔 북한 주재 말레이시아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북한과의 비자면제협정을 철회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를 두고 현지 중국어 매체인 <중국보>는 “단교의 전조라는 시각도 있다”고 보도했다. 말레이 정부가 강철 북한대사를 추방하고, 평양의 자국대사관을 폐쇄하는 걸 고려하고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동남아 언론들도 북한에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태국 언론 <방콕포스트>는 2월 21일 ‘용납할 수 없는 북한’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북한의) 범죄가 해외까지 뻗쳐서 또다시 아세안 국가들이 김씨 3대 세습자의 살인범들이 자행한 더럽고 피비린내 나고 야만적인 범죄의 뒤처리를 해야 할 판”이라고 비판했다.

<김진우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jwkim@kyunghy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