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왜 FIFA 수사에 나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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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는 이번 수사의 배경으로 미국이 2022년 월드컵 유치경쟁에서 카타르에 패배한 것을 들었다. 카타르가 당시 거액의 뇌물을 FIFA에 건넸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이때부터 미국의 자체 조사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4월 27일 새벽 6시, 스위스 취리히의 171년 역사를 자랑하는 최고급 호텔 ‘바우어 오 락’의 고요하던 로비에 갑자기 10여명의 수사관들이 들이닥쳤다. 거침없이 회전문을 지나 프런트 데스크로 향한 수사관들은 영장을 제시하며 연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투숙한 국제축구연맹(FIFA) 임원들의 방 호수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무수한 음악가와 화가들이 묵었고, 알프레드 노벨이 노벨평화상을 처음으로 구상했던 이 아름다운 호텔은 순식간에 범죄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으로 변했다.

그럼에도 이날 체포작전은 전례없이 우아했다. 호텔 컨시어지 직원은 한 임원의 방으로 전화를 걸어 “선생님, 아무래도 문을 열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발로 차고 들어가야 합니다”라고 정중히 말했다. 체포까지는 채 두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모든 과정은 평화로웠다. 수갑이나 총은 등장하지 않았고, 체포된 FIFA 임원들은 강제로 끌려나오는 대신 옷을 차려입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호텔 직원들은 새하얀 침대 시트를 펼쳐서 호송차에 타는 임원들의 모습을 가려줬다.

호텔을 급습한 것은 미국 사법당국의 공조요청을 받은 스위스 검찰이다. 제프리 웹 부회장을 포함해 FIFA 고위 임원 7명이 이 작전으로 체포됐다. 미 법무부는 이 체포 직후 FIFA의 전·현직 임원 9명과 스포츠마케팅 회사 간부 4명, 중개인 1명을 기소한다고 발표했다.

로레타 린치 미국 법무장관이 4월 27일 뉴욕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기소 대상에 오른 국제축구연맹(FIFA) 관계자 14명의 명단을 공표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로레타 린치 미국 법무장관이 4월 27일 뉴욕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기소 대상에 오른 국제축구연맹(FIFA) 관계자 14명의 명단을 공표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국제기구 수사할 수 있는 나라 없어
언젠가는 곪아서 터질 사건이었지만, 소문만 무성했던 FIFA의 부정부패 관행을 낱낱이 드러낸 미 검찰의 공소장은 전 세계에 충격을 던졌다. 공소장에 따르면 FIFA 간부들이 1991년부터 24년 동안 받아 챙긴 돈은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1억5000만 달러(약 1658억원)나 된다. 2010년 월드컵을 개최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월드컵 유치전에서 FIFA 관계자들에게 1000만 달러를 뿌린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월드컵 유치 대가를 내겠다고 한 것은 남아공 정부뿐이 아니었다. 월드컵 유치전에 뛰어든 모로코가 100만 달러를 제시하자 FIFA 집행위원이었던 잭 워너 전 부회장이 다른 집행위원들에게 “남아공은 1000만 달러를 마련할 준비가 돼 있다”고 알려 남아공의 손을 들어준 일도 있었다. 미 법무부가 “이번 수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비리규모는 더 커질 가능성이 크다. 제프 블래터 회장은 아직까지 수사대상에 오르지 않았지만, 취임 이후 줄곧 뇌물 스캔들에 시달렸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결국 기소를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월드컵이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행사로 자리매김하면서 FIFA는 유엔보다도 많은 회원국을 갖춘 대형 국제기구로 성장했다. 스위스 취리히에 비영리단체로 등록돼 있어 세금도 내지 않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은 채 천문학적인 자금을 운용한다. 지난해 브라질 월드컵에서 FIFA는 57억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현금보유액만 해도 15억 달러가 넘는다. 17년째 FIFA를 지배해온 블래터 회장은 내부에서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둘러 왔다. 워싱턴포스트는 그를 ‘지난 세기에 가장 성공한 독재자’라고 표현했다. 막대한 자금을 굴리며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는 거대조직 FIFA가 부패에 물든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지금까지 비리의혹이 수없이 제기됐지만 ‘세계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이 나서기 전까지 FIFA에 대한 전방위 수사가 이뤄지지 않은 것은 단지 국제기구를 수사할 수 있는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축구에 특별한 관심도 없는 미국이, 자국도 아닌 스위스에 본부를 뒀고 임원진 중에도 미국인이 거의 없는 FIFA의 내부 부패를 수사하고 나섰는지는 논란거리다. 미국은 혐의자들이 뇌물수수를 논의한 곳이 미국이며, 돈을 미국 은행에서 주고받았기 때문에 미국 법으로 이들을 처벌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BBC는 이번 수사의 배경으로 미국이 2022년 월드컵 유치경쟁에서 카타르에 패배한 것을 들었다. 카타르가 당시 거액의 뇌물을 FIFA에 건넸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이때부터 미국의 자체조사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미 검찰은 이번 사건에 대해 “수년간 자체조사를 벌여 왔다”고 밝힌 바 있다.

수사에 가장 격렬하게 반발하는 러시아는 미국 바깥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미국이 사법권을 행사하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미국이 사법권을 다른 나라로까지 확장하려는 노골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며 “이번 수사에는 (러시아를 지지했던) 블래터 회장의 재선을 막으려는 명백한 의도가 있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누가 비리를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미국이 상관할 일이냐”며 공격하기도 했다.

4월 27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북중미카리브축구연맹(CONCACAF) 본부를 압수 수색한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이 증거가 담긴 상자를 건물 밖으로 나르고 있다. / EPA연합뉴스

4월 27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북중미카리브축구연맹(CONCACAF) 본부를 압수 수색한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이 증거가 담긴 상자를 건물 밖으로 나르고 있다. / EPA연합뉴스

러시아·카타르와 미국 관계에 불똥
푸틴 대통령의 발언에서는 자칫하면 월드컵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러시아의 불안감이 읽힌다. 남아공 월드컵 유치과정이 비리로 얼룩졌다면 2018년 러시아 월드컵,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유치과정에서도 돈이 오간 정황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스위스 검찰은 이미 미국과 별도로 러시아와 카타르 월드컵 유치전에 참여했던 FIFA 집행위원 10명을 조사 중이며, 미국의 수사범위가 여기까지 넓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FIFA가 이후 월드컵 개최지를 변경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지만, 부패혐의가 발견되면 개최지를 바꾸라는 압력에 무너질 수도 있다.

러시아의 월드컵 개최는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일이다. 서방은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사태를 일으킨 러시아에서 월드컵을 개최할 수는 없다며 ‘월드컵 보이콧’을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그런데 친러 성향인 블래터 회장의 5선 연임을 결정하는 선거를 이틀 앞둔 날 미국이 FIFA를 정조준하고 나선 것이다.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로 인해 러시아는 이미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만에 하나 월드컵까지 개최하지 못한다면, 푸틴 대통령은 정치적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포브스는 “푸틴에게 월드컵을 잃는 것보다 나쁜 일은 없다. 러시아인들은 수입식품이나 터키로의 휴가 없이는 살 수 있지만 러시아가 월드컵도 개최하지 못할 정도의 불량국가로 낙인 찍히는 것은 용납하지 못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수사의 불똥이 미국의 중동정책으로 튈 수도 있다. 카타르는 걸프지역의 대표적 친미국가로, 사우디아라비아 등 걸프국 정상들이 워싱턴에서 열린 걸프협력회의(GCC) 6개국과 미국의 정상회의에 줄줄이 불참할 때 쿠웨이트와 단둘이 미국행을 택했을 정도다. 하지만 최근 들어 미국과 관계가 껄끄러워지고 있다. 물밑에서 하마스 등 무장단체와 중동 전역의 이슬람 극단주의자 단체에 자금을 대고 있는 것으로 공공연히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체이스 언터마이어 전 도하 주재 미국대사는 포린폴리시에 “미국은 이를 알면서도 카타르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눈감아주고 있다”고 말했다. 카타르 도하의 남쪽에는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과 연결된 주요 보급기지인 알우데이드 공군기지가 있고, 상당수의 미국 대학들이 카타르에 분교를 두고 있다. 포린폴리시는 카타르가 이 일로 미국과의 관계를 해치려 들지는 않겠지만 미국이 카타르 왕정과의 각종 협상에서 이번 수사를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은 있다고 내다봤다.

<남지원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somni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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