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프리뷰]그때 그 시는 무엇으로 남았을까

어떤 시는 단순한 문학작품이 아니라 한 시대의 기록, 혹은 한 세대의 상징이 되곤 한다. 김수영의 시가 바로 그렇다. 그의 시는 그 자체로 혁명이었고, 저항이었고 역사였다. 유혜율 작, 이은준 연출의 연극 <당신이 밤을 건너올 때>는 바로 이 김수영의 시를 통해 과거와 현재, 서로 다른 시대의 무게를 지고 살아가는 인물들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국립극단 제공

이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하나의 개인이면서 또한 한 세대를 대표한다. 누구보다 치열한 대학 시절을 살았지만, 이제는 무능하고 답답한 ‘꼰대’가 되어버린 586세대 형진과 무한경쟁의 취업난 속에 갈 곳을 잃어버린 그의 아들 준수, 같은 운동권 출신이면서도 시대의 흐름을 잘 타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현과 노동운동 중 세상을 떠나버리는 바람에 영원한 20대로 남아버린 윤기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서로 다른 시대 속에서 각기 다른 선택을 하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각자 시대의 무게와 삶의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하지만 작품의 초점은 확실히 형진에게 맞추어져 있다. 시민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하고 있는 형진은 여전히 약자의 편에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일하고 있지만 점점 자기 일에서도, 가정에서도 확신을 갖지 못한 채 겉만 맴돌 뿐이다. 윤기의 기일을 맞아 오랜만에 대학 선후배와 모인 자리에서 형진은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신을 자책한다. 그런 그에게 죽은 윤기가 다가와 조용히 김수영의 시를 읊어준다.

이 작품은 이렇게 50대의 형진이 죽은 윤기를 통해 김수영의 시를 마주하고 또 이를 통해 자신의 뜨거웠던 청춘을 마주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50대가 된 형진이 다시 마주하게 된 김수영의 시는 20대 때의 그 뜨겁고 찬란하게 빛나는 열정이 아니라 초라하고 비루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자 쓸쓸하게 일그러진 초상화에 가깝다. 그는 여전히 친구를, 그와 함께 읽었던 시를 그리워하지만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친구처럼 김수영의 시는 더 이상 형진을 구원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때 그 시는 형진에게, 또 우리에게 과연 무엇으로 남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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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이에 확실한 대답을 주지 않는다. 작품은 마지막까지 어떤 거대한 사건도, 반전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막이 내리고 나면 묘하게 따뜻한 여운이 남는데, 아마도 마지막에 낭송하는 김수영의 시 ‘사랑의 변주곡’ 때문인 듯하다. 모두가 한 구절씩 돌아가면서 읽는 도중 딱 한 번 다 같이 힘차게 합창하는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란 구절이 콱하고 가슴에 와서 박히는 까닭이다. 비록 씨앗에 불과할지언정 이들은 복숭아와 살구와 감에서 왔고, 다시 그 열매로 이어질 미래를 품고 있다. 이 장면에서 무대 위 검은 스크린을 뚫고 환하게 빛나는 김수영의 시어들 또한 아름답게 반짝이며 찬란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김주연 연극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