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것](9)사랑은 기다리다 만나는 것이다!

영화 <패터슨>에서 보여주는 연인의 사랑은 인상적이다. 평범한 일상 속 사랑이라 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정작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다룬 영화나 이야기를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 로맨스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런 로맨스물이 오히려 우리의 현실과 가깝다. 우리도 사랑에 빠지면 로맨스 속 주인공들처럼 삶을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로 꾸민다. 좋은 옷, 멋진 장소, 맛있는 음식, 여행이나 감상 같은 즐거운 경험! 그것이 아니라면 애절한 사연이나 심지어 삶을 뒤흔드는 불행마저 사랑을 피어오르게 한다.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게 아니라 전쟁 중이기 때문에 더 사랑한다. 죽음이 임박한 상황은 비장한 사랑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따뜻하고 온화하든, 격정적인 애정이든 사랑엔 보통 장식이 필요하다. 평범하고 반복적인 일상에서 사랑을 지속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 사랑하기 가장 어려울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다. 사랑을 꾸며주던 장식이 사라지면 사랑도 서서히 시들기 시작한다. 사랑은 시간 앞에서 힘을 잃는 것이 아니라 평범함 앞에서 힘을 잃는다. 무슨 이유일까? 사랑엔 늘 나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갈망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될까

사랑의 곤란함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만 사랑할 수 없게 된다는 모순된 성질에 있다. 그 사랑을 통해 나도 사랑받고 만족스러워지기를 원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될까? 나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는 사람이다. 누군가로 인해 기분이 좋아지고 만족스럽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그 사람은 나를 무엇으로 만족시키는 걸까? 사랑이 시작될 때라면 많은 이유를 댈 수 있다. 그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이 나를 만족시킨다고 믿게 되니까. 하지만 사랑이 끝나면 깨닫게 된다. 그것들 모두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위한 속임수였음을 말이다. 사실 그 사람이 가진 것들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말이다. 이렇게 사랑은 속임수를 통해서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속임수를 유지해줄 장식들이 필요하다.

꾸미지 않은 일상에서라면 사람들은 잘 속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와 성격과 습관, 취향이 다르다는 차이를 먼저 알아차린다. 요컨대 나와 다른 사람인 것이다.

다른 것이 왜 문제일까? 그냥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초록색을 보고 싶은데 노란색을 보여주면 그건 그냥 다른 색이 아니라 나를 실망시키는 색이 된다.

영화 <패터슨>으로 돌아가 보자. 패터슨과 로라는 사랑하는 사이다. 하지만 그들은 공통점이 거의 없다. 군인 출신의 버스 운전사인 패터슨의 삶은 반듯하고 단조롭다. 새벽에 일어나고 무채색의 밋밋한 옷을 입는다. 정해진 일과를 딱 맞춰 살아가는, 흐트러짐 없는 사람이다. 반면 로라는 새로운 도전에 머뭇거리지 않고 자유분방하다. 독특한 요리를 만들고, 다채로운 옷차림을 하고 화려한 문양을 그린 천으로 집안을 채운다. 두 사람이 편하게 여기고 지향하는 삶의 결이 달라 보인다. 여기까지는 우리의 현실과 동일하다. 하지만 영화는 거기서부터 달라진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점을 불평하지 않고 불만으로 느끼지도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판타지다.

현실 속 우리들이라면 늦게 일어나는 파트너에게 “좀 더 부지런해지는 게 어떻겠느냐” 혹은 “네가 늦잠을 자니 만날 혼자 아침밥을 먹는다”고 할 테고, “옷이 칙칙한데 좀 밝게 입으면 얼굴이 좋아 보일 것”이라고 할 테고, “헛된 꿈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현실적인 일을 생각해 보라”고 할 것이다. 전쟁도 없고, 아름다운 바닷가도 아니고, 멋진 음악도 깔리지 않은 일상에서 나와 다른 상대방의 행동에 긍정적으로 반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만족스럽지 않고 불편한 상황을 잘 버티지 못한다. 참을 수는 있다고 해도 소리는 내게 마련이다. “네가 나랑 달라서 좀 불편해!”

영화 <패터슨>의 인상적인 사랑

늘 자신이 원하는 것에 맞춰 만족을 얻어내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유치한 아이들의 상태다. 유아들을 보자. 아이들과 잠깐이라도 외출을 하려면 마치 캠핑이라도 가는 듯이 온갖 짐들을 챙겨야 한다. 위생용품, 먹을 것, 위급한 상황에 대비한 물품, 장난감까지 한 보따리를 짊어져야 한다. 아이들은 원하는 순간 바로 만족시켜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폭발한다. 아이의 성장은 이런 즉각적인 만족을 유예하고 기다릴 줄 아는 법을 익히면서 이뤄진다. 허기를 느끼면 바로 물던 엄마 젖을 포기하는 일과 같다. 입과 배를 빈틈없이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냥 비어 있는 채로 둘 줄 아는 것, 만족을 기다렸다 채울 수 있게 되어야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나를 만족시킨다고 믿는 사람이 좋아지면서 시작된다. 하지만 진짜 사랑은 그 사람이 더 이상 나를 만족시키지 않을 때부터 시작된다. 그때부터 사랑에 섞인 ‘나의 만족’이라는 불순물이 떨어져 나가고 진짜 ‘한 사람의 존재’를 감당하는 사랑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족이 없는 그런 고행 같은 사랑을 진짜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의 역설은 바로 거기에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을 그냥 그 사람인 채로 놔주고 사랑하면, 결국 그 사람이 빙그르르 돌아 내 앞으로 와서 나를 만족시키게 된다는 것.

영화 <패터슨>이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바가 그것이다. 특별한 장식이 없는 패터슨과 로라의 사랑에 함께 마음이 설렐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서로를 움켜잡으려 하지 않으면서 만난다는 것에 있다. 패터슨과 로라는 서로에게 바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나를 채워줘”라고 부탁하지 않는다. 대신 사랑하는 그 사람이 자기 앞에 오기를 기다렸다 만난다. 패터슨의 시를 함께 이야기할 때, 로라의 노래를 같이 들을 때, 늦잠 자던 로라가 컵케이크를 구우러 일찍 일어났을 때, 서로 다른 옷차림으로 같은 영화를 보러 갈 때조차 말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

사랑은 내가 원하는 것을 즉각적으로 얻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갈망·만족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사랑은 내가 원하는 것을 꼭 얻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대신 그 사람과 함께하는 것에 만족을 느낀다. 신기하게도 상대와 함께 있는 것 자체를 선물처럼 선사해준다. 그건 마치 버스를 타고 내가 가지 않아도 될 동네를 돌아 끝에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과 유사하다. 사랑은 곧바로 직진해서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하는 자가용이나 택시를 타는 것이 아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로라를 사랑하는 패터슨은 버스를 운전하며 동네를 돈다. 목적지에 가기 전 다른 행선지를 돌고 도는 버스처럼 패터슨과 로라는 서로를 만나기 위해 서로를 부르지 않고 기다린다. 각자가 자기 삶을 살면서 돌고 돌아 어느 한순간 내 앞에 도달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사랑은 그렇게 나와 다른 사람을 기다리다 결국 만나는 것. 그것이다.

<이수련 정신분석학 박사(한스아동청소년상담센터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