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권의 책]<노동의 새벽>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노동자의 현실’

반세기 전 어느 늦가을날,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며 한 청년 노동자가 분신했다. 전태일 열사, 그는 열악한 노동 현실과 척박한 민주주의를 한 단계 전진시킨 거대한 바퀴였다.

박노해 지음·느린걸음

그러나 작가 김훈은 ‘변한 것이 없다’며 비관적이다.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어처구니없이 숨진 김군과 태안발전소에서 터무니없이 스러진 김용균씨는 노동자들의 목숨이 ‘추풍낙엽’에 불과하다는 것을 엄중하게 일깨운다.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일어난 생명과 안전에 대한 각성은 국민들만의 가슴앓이인 듯싶다. 국회, 정부, 기업은 ‘철의 삼각동맹’을 만들었는지 꿈쩍도 않는다. 돈 없고 ‘빽’ 없는 노동자의 2세들이 대를 이어 다치고 죽어나가는 현실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신분 세습사회라는 의심까지 낳고 있다. 해마다 같은 사고로 생때같은 생명이 소멸하는 참사를 목도하면서 떠오른 책이 <노동의 새벽>이다.

‘얼굴 없는 시인’ 박노해의 첫 시집은 현장 노동자의 작품이라는 화제성을 넘어 참혹한 노동 현실을 폭로하고 고발했다. 문제는 1984년에 나온 시들의 시간이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간을 이기는 좋은 시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노동자에게는 지금이나 그때나 변함없는 ‘시시포스의 형벌’과도 같은 생활이 계속되고 있다는 한탄이다.

‘손 무덤’을 보자. 프레스에 손목이 날아간 노동자는 트럭 짐칸에 실려 병원에 가게 되고 차마 가족에게 잘린 손을 건넬 수 없어 공장 담벼락에 묻는다는 충격적인 내용이다. ‘지문을 부른다’는 혹독한 노동으로 지문이 사라져버린 노동자들의 참상을 드러낸다. 주민등록 갱신을 위해 지문을 찍어야 하지만 아무리 찍어도 지문은 나오지 않는다. ‘지문도, 청춘도, 존재마저/ 사라져 버렸나 봐’라는 시구는 인간 소외의 한 극단이다. 불안과 불만의 세월은 표제작 ‘노동의 새벽’에서 죽음의 예감으로 육박한다.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당시 노동자 박노해의 해법은 행동이었다. 시인에서 혁명가로 계급투쟁을 선동하며 실천했다. ‘기업주와 노동자는 사슴과 돼지처럼/ 결코 동등할 수 없다는’(‘대결’) 계급의식으로 무장해서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노동자만이/ 진실로 인간’(‘진짜 노동자’)이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권선징악과 파사현정이 실현되는 사회는 드라마와 무협지의 세계다. 뼛속까지 선인이나 악인인 사람도 양면성을 가지기에 현실은 비극적이다. 세속에서는 천사와 악마가 각각 발언권을 요구하면서 정당성을 다투게 된다.

이 한권의 책

<노동의 새벽>은 세계와 인간이 가진 간격과 모순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을 포기하고 노동계급의 당파성과 정치성만을 부각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하늘’)는 바람이나 ‘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 갈리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싶은’(‘시다의 꿈’) 소망은 왜 노동해방이 인간해방으로 이어지는지를 벼락처럼 깨우쳐준다. 참으로 <노동의 새벽>이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킨 공덕과 미덕이 무량하다. 그런데도 왜 노동자들이 나뭇잎처럼 추락하고 화로에 떨어진 눈송이처럼 사라지는 현실은 고쳐지지 않는 것일까.

<정승민 독서팟캐스트 일당백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