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고수는 다 어디로 갔을까

힘든 수련을 거쳐 강해져야 한다는 인식 대신 여가활동의 하나로 지역축제나 대중문화 콘텐츠로 생활 속에 들어온 무술의 모습이 더욱 부각되어 있다. 종합격투기가 빠른 속도로 보편화된 것도 무술 신화를 깨뜨리는 데 한몫했다.

인류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다. 그러나 맨손 맨몸의 싸움으로 조건을 한정시켜보면 의외로 그 역사도, 기술이 발달한 기간도 그리 길지 않다. 도구를 사용하는 ‘호모 하빌리스’는 사냥을 할 때건 약탈이나 전쟁을 할 때건 주먹보다 강한 무기를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현재 종합격투기의 본격적인 기원으로 꼽는 고대 그리스의 ‘판크라티온’ 경기나 이후 로마제국 등에서 열린 유사한 경기 당시에도 주먹에 징을 박은 붕대를 감았을 정도로 순수한 맨몸 격투의 모습은 상당히 근래에 와서야 정착된다.

발차기 무술 고수를 가리는 ‘레드불 킥잇’ 출전자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무술 시범을 보이고 있다./김영민 기자

엽문, 황비홍, 이서문, 곽원갑 등 무술가

동아시아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나 만화 같은 대중매체를 통해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중국무술 역시 실상을 보면 청 왕조 후기에 와서야 각 지역에 성립한 유명한 문파들이 경쟁하듯 알려지기 시작했다. 엽문과 황비홍, 이서문, 곽원갑 같은 대표 무술가 덕에 유명해진 영춘권·홍가권·팔극권·연청권 등 각각의 무술이 기록에 나타난 시기는 대부분 19세기 중·후반이었다. 게다가 ‘고수’로 숭상되는 이들 인물과 그 권법 역시 무기술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세계적으로도 본격적 맨몸 격투의 역사는 불과 100년 안팎이라는 데 무술·격투기 전문가들은 동의한다.

“현대사회의 무술은 기존의 생존수단, 싸움기술의 형태에서 새롭게 변화해 가고 있다. 무술이 여가활동과 취미활동의 영역에서 자리를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곽정현 가천대 교수(태권도학)는 최근 들어 한국의 전통무예를 비롯해 각종 무술과 격투기들이 일종의 문화 콘텐츠로 자리잡는 변화가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강해져서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극한의 수련까지 감내하며 고수를 동경하던 무술가의 이미지는 퇴색되고 있다. 곽 교수가 쓴 ‘문화 콘텐츠로서의 무술, 현재와 미래의 공존’ 논문에서도 힘든 수련을 거쳐 강해져야 한다는 인식 대신 여가활동의 하나로 지역축제나 대중문화 콘텐츠로 생활 속에 들어온 무술의 모습이 더욱 부각되어 있다.

현장에서 체감하는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더욱 빠르다. 10대 때부터 태권도와 합기도, 특공무술, 킥복싱 등 타격계 격투기를 수련하며 한동안 관장으로 선수 지망생들을 지도했던 이대호씨(48)는 지난해 운영하던 체육관을 정리했다. “이제는 낯간지러워서 누구한테 말하지는 못하지만 아직도 더 강해지는 게 꿈이긴 하다”는 이씨지만 더 이상은 강해지는 것도, 강함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을 지도하는 것도 어렵다는 점을 현실에서 체감했다. 일단 수요가 적을 뿐만 아니라 강함을 다투는 경기가 종합격투기(MMA)로 일원화되면서 전문성도 그만큼 더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이씨는 “펀치와 킥, 클린치 같은 입식 상황은 자신있지만 반대로 그라운드에서의 대응책도 없고 근력이나 기초체력을 훈련시킬 노하우도 없이 이 일을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오히려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쪽은 과거에만 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여성 중심의 다이어트 운동 분야였다. 순간적인 폭발력은 다소 부족하지만 상대적으로 근지구력에는 장점이 있는 여성들에게 전신을 반복 사용하는 발차기 등의 운동 프로그램은 효과가 좋아 입소문도 났다. 이씨는 “한 사람을 최고로 성장시키는 것 대신 최대한 많은 사람을 조금이나마 더 건강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보람도 느낀다”고 말했다.

종합격투기가 등장한 이후 빠른 속도로 보편화된 것도 ‘비전(秘傳)’을 전승한 최고의 무술·격투기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신화를 깨뜨리는 데 한몫했다. 국내에서는 ‘최배달’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공수도 단체 극진회관의 최영의(일본명 오야마 마스타츠) 관장은 몸에 실제 가격을 하지 않고 대련을 하던 ‘슨도메’ 규칙에 맞서 온 힘을 실어 치고받는 ‘풀콘택트’ 룰을 도입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의술이 발달하기 전이라 실전처럼 대련하면 부상의 여파가 치명적일 수도 있던 상황에서 만들어졌던 근대 이전의 룰을 극복한 결과와 현대적인 홍보가 결합되면서 한동안 극진회관의 공수도는 최강의 격투기라는 세간의 인식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최강’을 선망하며 더욱 많은 수련생들이 모여들수록 대련 과정에서의 부상을 피하기 위해 얼굴을 주먹으로 때려서는 안 되고, 쓰러진 상대를 공격하는 것도 금지되는 등 다양한 규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글러브를 끼거나 안면보호구 등을 끼고 대련하는 등 변화를 추구한 다른 유파와의 경쟁은 물론 각 무술마다 가진 금지규정을 최소한으로 줄인 종합격투기 링에서의 대결에서도 극진회관은 물론 그 어떤 무술 유파든 ‘최강’의 자리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레슬링·주짓수·킥복싱·복싱, 최소한 이 네 가지는 필수적으로 해야 한다. 꼭 필요한 기술만을 뽑아내서 쓴다는 점에서.” 서울의 한 종합격투기 체육관 사범인 최모씨(38)는 “종합격투기 자체가 규칙이 있는 하나의 스포츠 종목”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흔히 말하는 ‘실전’이라는 개념도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최강’이란 더더욱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레슬링·주짓수·킥복싱·복싱은 필수적

종합격투기 초창기인 1990년대와 20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UFC 등 종합격투기 무대에서 한 종목에서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강자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라운드 기술에 취약한 타격계 격투가가 상대적으로 밀린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웃복싱 스타일에 장점이 있는 선수도 잡고 싸우는 레슬링과 주짓수의 기술을 필수로 익혀야 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최 사범은 “그래서 선수 양성이 목적인 체육관에는 복싱이나 주짓수 등 각 부문별로 전문적인 코치를 따로 두고, 생활체육이 목적인 곳에서는 오히려 각각의 개별종목 수련에만 주력하는 식으로 바꾸기도 한다”고 말했다.

부상을 피하고 즐기면서 가볍게 수련하는 생활체육 형태의 무술 수련이 점차 대세가 되면서 오히려 무술을 고를 수 있는 다양성은 더욱 늘어나고 있다. ‘당수’가 태권도라는 이름으로 통합작업을 시작한 1960년대 이래 한국의 전통무술을 표방한 무술은 물론, 중국무술 또는 군용무술, 일본계 고전무술 등 다양한 무술들이 유행을 타고 국내에서 뜨고 지기를 반복했지만 잠깐 반짝했던 ‘고수’들의 이름을 빌려 ‘지도자 코스’라는 속성 자격증 발급 관행이 이뤄졌던 것은 국내 무술계의 어두운 이면이었다.

자신도 한때 중국무술 등 10여가지 무술유파의 지도자 인가증을 돈을 내거나 친분을 이용해 확보한 적이 있다는 한 무술도장 관장은 “그때는 팔다리 사지를 움직이는 거니까 하나만 잘해도 다른 것도 원리는 알 거라며 돈 받고 단증 내주던 관행이 허다했다”면서 “실제 그 유파만의 보법이나 호흡법 같은 건 이해하지도 못한 채 수련생들한테 단증 장사를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실제 마니아적인 관심을 갖고 동호인들끼리 모여 수련회를 정기적으로 여는 쪽으로 변화가 나타나면서 신비로운 고수의 움직임 대신 보다 합리적으로 다양한 유파를 비교하고 즐기는 일이 가능해졌다. 갑옷 같은 보호구를 착용한 상태에서 공격을 주고받는 고전무술 동호회에 참석하는 동호인 배성규씨(29)는 “고전무술이라고 하면 일본 같은 몇몇 나라에서만 동호인층이 활성화돼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최근 들어 한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관심을 가지는 동호인들도 늘고 있어 정보교류와 기술비교 등도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